전통 중국의 상인(4)    晉商-楡次의 常家


옌훙중(燕紅忠)ㆍ류청후(劉成虎) _ 중국 산시대학 진상학연구소 씀

송요후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옮김


산시성(山西省) 위츠(楡次)의 대외교역 명문가문(外貿世家)인 창가(常家)는, 천하의 재물을 취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온 천하에서 이윤을 추구했다. 창가는 우이산(武夷山)에서 차(茶)를 제조해 캬흐타1)의 마을에까지 진출해, 만리(萬裏)에 걸친 차 루트(茶路)를 개척해, 2백여 년 동안, 몽고, 러시아, 북유럽에 중개 판매해, 결국 부(富)를 통해 천하에 널리 이름을 알린 진상(晉商)들 중에서도, 독보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 상업 가문을 이루었다. 창가의 대저택(莊園)은, 산시성의 수도인 타이위안(太原)에서 약 30㎞ 떨어져 있는, 산시성 위츠시(楡次市) 서남쪽의 동양진(東陽鎭) 처왕촌(車輞村)에 위치해 있다. 가장 융성했을 당시, 창가의 대저택에는 총 4천 여 칸에 달하는 백여 채의 가옥이 있으며, 이중 다층 건물(樓房)은 50여 채에 이르며, 대지 면적은 60만㎡에 달해, 빽빽이 들어선 건물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1 _ 창가, 입신양명하다.


명(明)의 성화(成化) 연간에 타이구(太穀) 후이안촌(惠安村)의 창중린(常仲林)은 쉬거우현(徐溝縣)2) 동관(東關)으로 이주하여, 쉬거우에서 결혼해 자녀를 낳고, 후에 다시 타이구 둔팡촌(敦坊村)3)으로 이주하여, 또 후손을 낳았다. 후에 또 처자식과 떨어져 홀로 위츠의 처왕촌으로 와서 류(劉)씨 성의 부자 주인집에 들어가 양을 방목하였다. 창중린은 사람됨이 충직하고 온화하며 성실해, 주인집의 호감을 얻었고, 류씨는 계집종 출신의 양녀를 그와 혼인하도록 하였다. 창중린은 이후 이곳에서 안정을 찾았다.《常氏家乘》에 따르면, 명 홍치(弘治) 13년인, 1500년, 처왕촌에 있는 촨쟈오사(傳敎寺)가, 기부금을 모아 중수(重修)할 때, 주조한 두 개의 철종(鐵鐘)에는 모두 창중린의 이름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에는 “타이구의 현인(太穀縣人)”으로, 다른 하나에는 “본촌의 시주(本村施主)”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창중린은 이미 상당한 재물을 축적했던 것으로 보인다. 명 가정(嘉靖) 3년인, 1524년, 처왕촌의 성채보살사당(成寨菩薩廟)을 다시 보수할 때, 기부자 중에는 이미 창중린이라는 이름은 없고 그의 아들 창아오(常?)가 있었다. 창중린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창가 제3대에 이르러, 창팅허(常廷和)·창팅메이(常廷美)·창팅위(常廷玉) 삼형제가 있었으며, 창가가 비록 이곳으로 이사 온 지 4, 5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타지방 사람으로 여겨졌다.


처왕의 창가는 1대부터 3대까지, 기본적으로 양을 방목하고 농사짓는 것으로 생계를 삼았고, 돈도 없고 위세도 없었으며, 자손들도 번창하지 않았다. 제4대부터, 농업과 목축에서 상업과 무역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위츠의 처왕촌은 산시 분지의 진수이하(津水河) 하류에 위치하여, 산시 교통의 중추지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명대에 개중법(開中法)4)이 실시된 이래, 진상들은 점차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산시성이 전국의 각 성들 가운데 가장 부유한 곳이 될 수 있었다. 산시성 일대에서 부유한 대상인들이 끊임없이 나타났고, 길에서는 소상인들의 수레와 말이 남북을 오고 갔다. 창가 사람들은 이 같은 상황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어떤 이는 아주 재빨리 상업이 농업 보다 더 빨리 부를 이룰 수 있음을 깨달아 외지로 가서 상업에 종사했다. 명말ㆍ청초, 창가의 제5대 및 제6대 자손들은 각 종 천재(天災)와 인재(人禍)가 반복되는 가운데에서도 일시적으로나마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명대에 창가는 비교적 가난했으나, 삼형제가 분가한 이후, 창팅메이의 자손만이 가장 번성했으며, 나머지 두 지파는 사라지거나 소수의 자손만을 남겨 놓았다. 창가의 족보(家譜)에 따르면, 창웨이(常威)와 그의 두 아들 창완지(常萬玘)·창완다(常萬達)가 강희(康熙) 연간에 직업을 바꿔 사업을 시작한 후에 창가는 비로소 부유해지기 시작했다.

창웨이는 강희 15년(1676년) 경에 태어났는데, 삼형제 중 두 번째인(二門) 창팅메이의 후예인 창진위안(常進全)의 아들이다. 그는 강희 40년(1701년)에 장쟈커우(張家口)로 가서 상업에 종사했다. 처음 장쟈커우에 이르러 직업을 바꿨을 때는, 단지 행상에 불과했고, 샤바오구러우(下堡鼓樓)에서는 노점을 차려 “위츠의 천(楡次大布)”을 판매하였다. 한번은, 창웨이가 사들인 한 무더기의 백포(白布)가 막 도착했는데, 때마침 친왕(親王) 한 명이 세상을 떠나, 관부(官府)가 강제로 전 지역의 백성들에게 상복을 입고 허리에 삼베 끈을 매도록 했다. 이로 인해 백포에 대한 수요가 갑자기 치솟아 일시에 다 팔렸으며, 그는 하룻밤 사이에 거액의 돈을 벌었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자본의 본원적 축적을 완수하였다. 이후로, 창가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고, 상가(商街)에 점포를 구입해 “常布鋪”라 이름을 지었다.


창웨이의 세 아들인 완지(萬玘), 완왕(萬旺), 완다(萬達)는 모두 아버지를 따라 장쟈커우에 왔는데, 완왕만 장쟈커우 교외에 땅을 구입해 농사를 짓고, 완지와 완다는 모두 부친과 함께 상업에 종사했는데, 창웨이의 오른팔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아버지와 아들 세 사람이 10여 년간 한마음으로 합심해 노력한 결과 장쟈커우에서의 창가의 사업은 매우 빠른 발전을 이룩하였다. 창웨이는 학문이 완성된 후에 비로소 상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는데, 창완지와 창완다 역시 시서(詩書)를 충분히 공부한 이후 아버지의 사업을 계승하였다. 특히 창완다는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장쟈커우에서 공부를 했는데, 근면하고 열성적으로 공부해서, 스승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창웨이는 그가 과거에 응시하려 했을 때, 관리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상업에 종사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學而優則賈(지식과 재주를 모두 익혔으면 응당 상업으로 나가야 한다)”를 가훈(家訓)으로 삼고, 자식들에게 대대로 따르도록 훈계하였다. 창웨이의 둘째 아들인 창완왕이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자, 창웨이는 그가 상업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하고, 장쟈커우에 토지를 구입해 농사를 짓게 했다. 창웨이의 이러한 선견지명이 있는 조치는 처왕 창가 유상(儒商)의 기초를 닦았고, 사업의 신용 및 관리 모두가 예사롭지 않았다. “學而優則賈”의 가훈은 그의 사업이 아주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건륭(乾隆) 초에 이르러, 창웨이 부자는 이미 장쟈커우에서 “다더창(大德常)”과 “다더위(大德玉)”이라는 두 개의 꽤 큰 규모의 상점을 설립하였다. 창가가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여 점차 장대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창웨이처럼 고통과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위험을 무릅쓴 창시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창가의 후손들은 그를 존경하여 “성공의 할아버지(發跡祖)”라 부른다.


2 _ 남쪽 창가(南常)와 북쪽 창가(北常) 


건륭 초, 연로하고 몸이 쇠약해진 창웨이는 상점을 장자인 창완지와 셋째 아들인 창완다에게 맡겨 운영하도록 했다. 결국 처왕의 창가는 점차 창완지와 그의 아들인 화이메이(懷?)·화이쉰(懷珣)의 “남쪽 창가(南常)” 그리고 창완다와 그의 아들인 화이위(懷玗)·화이졔(懷?)·화이페이(懷?)의 “북쪽 창가(北常)”를 핵심으로 하는 두 개의 상업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두 집단은 서로 협력하며 발전하여 장쟈커우의 중요한 상업가문(商家)이 되었다.



난창(南常)은 포목(布匹)ㆍ각종 생활용품(百貨)과 약재(藥材) 등을 다루었는데, 주요하게는 쓰촨(四川)의 모시(夏布)와 백두산(長白山)의 고려인삼(高麗蔘)을 취급했다. 창화이메이와 그의 후대는 “다더창(大德常)”의 기초 위에서, 근면하고 성실하게 업무에 임했으며, 백여 년에 걸쳐 다통(大同)·판즈(繁峙)·청두(成都)·한커우(漢口) 등에 “다더촨(大德川)”·“다더메이(大德美)”·“다더창(大德昌)”·“다더창(大德常)”·“다더청(大德成)”·“다더이(大德億)”·“다더마오(大德懋)”·“다더광(大德光)”ㆍ“다더정(大德正)”·“다더펑(大德豊)” 등, 이른바 “十大德”으로 불렸던, 10 개의 상점을 설립했다. 이로써 장쟈커우를 중심으로 하여, 다쟝(大江) 남북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상업망을 형성하였다.


베이창(北常)은, 국경무역에서, 차와 비단 등을 취급했다. 창완다는 시야가 원대하고 담력과 식견이 뛰어나, 러시아와 몽골로 사업을 확대해 나가며 국제무역을 진행하는 사업상의 전략을 펼쳤다. 러시아는, 차에 대한 수요는 매우 높아, 명대 이래로, 지속적으로 무역을 요구해 왔으며, 옹정(雍正) 5년에 이르러서는 청 정부와 러시아 정부는 《중ㆍ러 캬흐타 조약》을 체결했고, 옹정 8년부터 중·러 국경무역 도시인 캬흐타의 건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여러 원인으로 인해, 일단 쌍방이 무역을 개시했으나 결코 순조롭지 못하여, 10여 년이 지났음에도, 무역액은 여전히 10여 만 루블에 지나지 않았다. 이 같은 현실에도 불구하고 창완다는 미래의 사업성에 주목했다. 건륭 10년, 그는 전격적으로 다더위(大德玉)를 차 도매점(茶莊)으로 전환해, 국내무역을 병행하는 동시에, 자금과 정력을 러시아와의 무역에 집중적으로 투입해 만리(萬裏)에 걸친 차 루트(茶路)를 개척해 2백여 년이나 이어지는 업적을 이룩하였다. 결국 “다더위(大德玉)”·“다성위(大升玉)”·“다촨위(大泉玉)”·“다메이위(大美玉)”·“두선위(獨愼玉)”·“다용위(大湧玉)”·“다순위(大順玉)”·“산더위(三德玉)”·“바오허위(保和玉)”·“타이허위(泰和玉)” 등 베창(北常) “十大玉”의 집단경영을 형성하였다. “學而優則賈”의 가훈을 수립한 창웨이가 창가 발전사에 있어 시대의 획을 그은 인물이라고 한다면, 만리에 걸친 차 루트를 개척한 창완다는 창가 발전사에 있어 이정표 새운 인물이다.  


제품의 품질과 신용을 중시하였던 창가는 진상들 중에서 가장 먼저 차의 수매, 가공, 운반이 연속하여 진행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즉, 자체적으로 푸졘성(福建省)의 우이산에서 차산(茶山)을 사들여, 찻잎의 생산을 조직했을 뿐만 아니라, 푸졘성 충안현(崇安縣)의 샤메이진(下梅鎭)에 도매점을 설립해, 찻잎을 정선해 수매하였다. 동시에 자체적으로 찻집·차 창고를 설립해, 다양한 차들을 정제, 가공해 홍차(紅茶), 전차(?茶)로 만들어 보관하였다. 매년 찻잎 수확 시기에는 1천여 명의 현지 장인을 고용해 찻잎을 가공했으며, 그 후에는 마차와 말을 이용해 허커우(河口)5)까지 육로로 수송한 뒤, 다시 선단(船幇)을 이용해 수로(水路)를 따라 신강(信江), 판양호(?陽湖), 창강(長江)을 거쳐 한커우(漢口)에 이르고, 한수(漢水)를 따라서 샹판(襄樊)까지 도착한 이후, 다시 탕허(唐河)를 돌아 북상해서 허난성(河南省)의 서치진(社旗鎭)6)에 도착해서는 다시 가축에 짐을 실어 북상했다. 뤄양(洛陽)을 거쳐 황하를 건너고, 타이항산(太行山)을 넘어, 진청(晉城)·창즈(長治)를 거쳐, 치현(祁縣) 쯔홍커우(子洪口)로 나와, 루촌(魯村)에서 다시 가축이 끄는 대형 수송차로 바꿔 북상한다. 타이위안(太原)·다통(大同)을 거쳐 장쟈커우나 구이화(歸化)에 이르면, 다시 낙타로 바꿔 쿠룬(庫倫)·캬흐타(恰克圖)까지 운반한다. 전체 노정은 7천여 리에 가깝다. 낙타로 운반하는 것은 말로 대형 수송 차량(大車)을 끄는 것보다 안전하고 빠르고 싸며, 낙타 한 마리당 4백여 근(斤)을 실을 수 있었으므로, 창가는 이른 시기에 낙타를 이용한 대상(隊商)을 갖추었는데, 사업이 번창했을 때는 낙타의 숫자가 만여 마리에 이르렀다. 낙타를 이용한 운송은 장쟈커우로부터 캬흐타까지는 물론이고, 황하를 거쳐 진(晉)으로 진입한 이후, 러시아의 모스크바 등지까지 이어졌다. 또한 낙타들이 이동하는 루트를 따라 이른바 “駱駝店”7)이 동시에 발전했다. 이 같은 차의 운송 노선을 후대의 사람들은 “비단길”에 견주어 “차의 길(茶葉之路)”이라 불렀으며, 운송 수단으로 낙타를 주로 이용했기 때문에 “낙타길(駝路)”로 부르기도 했다.


운송 중, 차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창가는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 냈다. 원래 낙타 대상들은 전통적으로 사각형의 대바구니를 이용했으나 운송에 불편해, 사각형 대바구니를 반원(半圓)의 기둥 모양으로 바꾸었으며, 이 같은 대바구니에 잘 맞게 포장한 두 개의 차를 맞대면 하나의 큰 모자 상자 같은 모양이 되었으므로, 이렇게 포장한 차를 모자 상자 차라는 뜻의 “마오허차(帽盒茶)”라고 불렀다. 장기간의 수송과정 중, 개별 포장을 하지 않은 차(散茶)가 빛에 쪼이고 비에 젖어 맛이 변하기 쉽다는 것을 발견하고, 나무 상자 속의 납항아리 안에 모아 담아둠으로써 찻잎의 품질을 유지하였다.


낙타 수송 중에 창가는 다양한 운영방법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80필의 낙타를 1방(幇)으로 하고, 5필을 1행(行)으로 해, 모두 16행(行)이 1방을 구성하도록 했다. 또한 하나의 방(幇)은 18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 사람이 각 행(行)을 관리하도록 했으며, 전체를 통솔하는 방수(幇首) 그리고 몽골인 한 명을 고용하여 길을 안내하는 것은 물론이고 물과 숙영지를 찾도록 했다. 이와는 별도로 각 방(幇)마다 의약에 능통한 사람을 한, 두 명 배치하여, 필요한 약품을 구비하도록 해, 사람과 낙타의 건강을 관리했다. 한편, 당시 러시아와 몽골 일대에는, 마적(馬匪)이 창궐했다. 마적들은, 건장하고 빠른 속도로 말을 탈 줄 알았는데, 이들은 빠른 속도로 달리는 말을 탄 채로 낙타 대상의 옆으로 달려와 몸을 구부려 낙타 안장 위에 있는 은 덩어리(銀器)를 약탈하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상인들이 무장한 호송원을 고용했지만 마적들의 약탈을 막을 수 없었다. 이에, 창가는 러시아에서 수입한 대량의 은 덩어리를 교역도시에서 녹인 후 마제은(馬蹄銀)으로 주조해 국내로 운반해 들여왔다. 캬흐타에서 중국으로 운송하기 위해 창가 자체에서 주조한 마제은은 덩어리마다 무게가 1000량(兩)으로 64근(斤)에 달했을 뿐만 아니라, 전용 마차를 제작해 운반했기 때문에 마적이 약탈할 때 몸을 구부려 채찍으로 약탈할 방법이 없어서 부득불 버려두고 가서, 모두들 이러한 큰 마제은을 어찌할 수 없다는 뜻의 “메이나허(沒奈何)”라고 불렀다. 후에 각 상인들은 모두 창가의 방법을 배워 “메이나허”를 주조했기 때문에, 마적들은 “메이나허”에 직면해 전에 비해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창가는, 이외에도, 차를 수송하는 루트에 있는 상업 및 무역 도시(城鎭)에서, 자신의 점포와 사무소를 설치했다. 이 같은 점포와 사무소들을 통해, 창가의 사업을 홍보하는 것은 물론이고, 현지를 오가는 창가의 상단을 위해 각종 서비스를 제공해 줄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점포 및 사무소들은 장쟈커우에 있는 창가 본부에 수시로 각 지역의 사업 현황을 보고함에 따라 창가는 사업과 관련해 다양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창가가 각지에 사무소를 설립한 것은 또 다른 중요한 사업전략의 일환이었는데, 이들 사무소를 통해 표호(票號)의 경영에 참가했다. 장국(?局)·표호(票號) 등 금융업에 대한 참여는, 창가의 상업자본의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 집단 내부와 외부의 자금 융통을 유리하도록 만들었으며, 교역을 위한 거액의 자금을 쉽게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3 _ 창가의 가규(家規) 및 경영 이념


창가의 상업이 발전한 것은 시기적(天時) 그리고 지리적(地利) 요인과도 관계가 있으나, 이 한 가문이 2백여 년이나 길게 이어가면서 오랜 기간 동안 번성하며 쇠락하지 않은 근본원인은 창가가 교육에 중점을 두어 인재를 배양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을 통해 유학의 이념을 학습해 품격과 덕(品德)을 배양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유학의 시조(祖)격인 맹자(孟子)의 어머니가 살았던 집이 위츠 고성(古城)의 서남부에 있었다고 하며, 여기에 맹모(孟母)의 사당(廟)이 있으며, 그 사당 앞에는 “단기태(斷機台)”가 있는데, 민간에서는 맹모의 유적이라 널리 알려져 있다(유가(儒家)에 대한 창가의 호의가 이것으로부터 기원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중국 전통사회는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천시하는 의식이 뿌리 깊게 내려 있었고, 그에 따라 형성된 “사·농·공·상(仕·農·工·商)”의 계급구분으로 인해 상인은 큰 차별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상업에 종사해 집안을 일으킨 이후, 교육을 매우 중시한 창가는 결코 이러한 사상에 속박되지 않고 “學而優則賈”의 가훈을 유지했다.


그들은 유명한 스승을 모셔와 유학을 학습하고, 온 힘을 다해 인재를 배양했으며, 학문적 성과를 거둔 이들을 지속적으로 상업계 진출시킴으로써, 우수한 인적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창완지와 창완다의 사촌형인 창완위(常萬育)가 집에서 사숙(私塾)할 당시, “부지런함과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에 대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능력을 칭송했지만, 그의 어머니만이 오직 그에게 타오주(陶朱)8)의 재주를 배울 것을 명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북상(北上)하여, 선조들이 남겨 놓은 재물을 이용해 20년을 경영한” 후에 상계의 명사가 되었다. 창가 제10대인 창화이메이(常懷?)는 수서(壽序)에서 “처음에는 독서를 하도록 하는 것이 대단히 이해가 가지 않는데, 오래 동안 상업에 종사하면 고생이 극에 달했다. 상가(商街)에 머무름에 이르러서는, 더욱 법도로 삼을 만한 것이 있으니,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갖은 고생을 다함으로써, 정신을 단련하고, 계산서와 산가지를 갖고서 지략을 넓힌다. 상품을 깊이 숨겨 둔 자는 외견은 약해 보일지라도, 훌륭한 상인의 풍모가 있다; 그 헤아린 것이 자주 들어맞아, 단목(端木)9)의 기풍이 있다. 의를 지키는 것이 총산(崇山)과 같고 신용에 의지하는 것이 단단한 돌과 같으니, 비록 타오주(陶朱)라 할지라도 물러서지 않는다”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제12대인 창이(常?)의 묘지명(墓誌銘)에는 “부친을 따라 창위안(長垣)에서 장사를 했는데, 무릇 경영을 궁리했으며, 그것이 좌우하였다”라고 새겨져 있다.


비록 “수서(壽序)”와“묘지명(墓誌銘)”에는 칭찬하고 아름답게 꾸민 문구가 있음을 피할 수 없으나, 창가는 200여 년의 경영 과정에서, 유교의 가르침을 중시하여 교양 있고 예를 갖추었으며, 유가(儒家)의 도덕을 상업 경영에 융합한 통찰력과 탁견이 있는 인재들을 양성해 냄에 따라 창가가 오래 동안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창가의 가족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도처에 뜻을 갖고, 영리사업에 종사하며 매석하니, 흡사 공문(孔門)의 단목(端木)과 같다: 천리 밖의 승패를 결정지어, 느닷없이 치부할 수 있음에, 월나라(越國)의 대부(大夫)인 범여(範?) 못지 않다” “三晉儒商” “名門望族”. 창가의 일족이 이 같은 평가를 받기에는 한 치의 부족함이 없다.


창가의 일족이 “부는 삼대를 넘지 못한다”는 고정관념을 넘어설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유가(儒家) 사상을 상업을 전개하는데 적용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활동 중에서 명확한 유가의 윤리도덕을 체현해 냄으로써, 경제적 이성(理性)과 도덕적 이성(理性)의 통일을 실현해 냈기 때문이다.


창가는 유가의 근검(節儉)을 근본으로 하는 살림(持家)·수신(修身)·자립(立業)의 도(道)를 준수했으며, “자신을 대할 때는 오직 검소하고(待己唯儉), 남을 대할 때는 오직 성실하라(待人唯誠)”는 유가의 가르침을 “하늘은 변하지 않으며, 도 역시 변하지 않는다(天不變,道亦不變)”는 신조로 받아 들였다. 창가의 사당(祠堂) 안에는 “말 등에 거는 대형 주머니(?馬)”와 “常布鋪”라는 편액이 100여 년간 모셔져 있다. 이 “말 등에 거는 대형 주머니”는 창웨이가 장쟈커우에 처음 북상했을 때 사용한 것이다. 창가 제9대인 창완다는 선친의 유업을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부친의 유풍(遺風)을 더욱 더 발전시켜, “무역하며 있고 없는 물품을 교환하는데, 고생을 피하지 않으며 수십 년을 지낸 것이 하루와 같다. 항상 변함없이 지내며, 그 호화스러움을 반드시 경계하였다.” 바로 이러한 사람이 만리에 달하는 차의 길(茶路)를 열었으며, 웅대한 가업을 발전시켰다. 자손들에게 근검을 가르치기 위해 창웨이는 “말 등에 거는 대형 주머니”와 “常布鋪”라는 편액을 사당 내에 모셔두었다. 그리고 그 스스로 여전히 “가득 차나 넘치지 않고, 있는 것을 없는 것 같이 보며,” “근면하게 수신하고,” “검소함으로써 덕을 기르며,” 또한 상업 이윤으로 투자를 확대하여 후대에 이르러 부가 사치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상당한 정도 방지하였다. 제9대인 “완(萬)”자 항렬과, 제10대인 “화이(懷)”자 항렬은 사업 초창기여서, 먹고 입는 것이 모두 점원들과 그다지 구별이 없었다. 제13대인 “리(立)”자 항렬에 이르러, 집안의 형편이 흥성하였으나, 그들은 다른 부상(富商) 일족들과는 달리, 영업은 지배인(掌櫃)에게 맡기고, 창가의 남자들은 청장년 때, 대부분의 시간과 정력을 각 상점의 경영에 쏟아 부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청춘을 모두 만리에 달하는 상업 루트를 개척하는데 바쳤다.


창가는 자신들의 사업에 대해 줄곧 유교적 敬業精神(최선을 다하는 정신)을 엄수하였다. 주 업종인 차에 대해서는, 구매로부터 가공·운송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경영하는 각종의 제품마다 모두 진지하게 책임을 져서, 제품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발생해 자신들의 명성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했다. 창가가 위츠에서 개설한 루이롱위(瑞隆裕)는 창가 일족이 운영하는 생활용품 상점이다. 그러나 물품이 들어올 때, 철기(鐵器)는 반드시 루안(潞安) 제품이어야 하며, 대나무 제품(竹器)은 반드시 칭화(靑華)산이어야 하며, 사기(砂器)는 오직 핑딩(平定)에서 생산된 것이야 했다. 삼밧줄은 달인을 청해 자체에서 가공했는데, 상등(上等)의 원료를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끈의 반제품을 만든 후, 5일간 햇볕에 말리고서야 비로소 여러 가닥을 꼬아서 밧줄 완제품을 생산했다. 이렇게 창가에서 생산된 한 줄의 밧줄은 다른 상점에서 판매하는 세 줄을 합친 것에 필적했다. 이 때문에, 산시성의 각 현(縣)에서는 “좋은 밧줄을 사려면, 루이롱(瑞隆)을 찾아라”라는 말이 돌았다. 진상은 “다만 그 마음이 순박하고 진실하다”는 청나라 사람 궈쏭타오(郭嵩燾)의 말이 한 치의 틀림도 없이 들어맞는 대목이다.


창가는 장사를 함에 있어서 신용을 지키는데 중점을 두었고, 이것은 그들이 유학의 신조를 지켰다는 또 다른 증거이다. 그들은 거래가 오고가는 중에 있어서, “신용 제일”을 성실하게 지켜, “재물을 가볍게 보고 약속을 중히 여겼다.” 차의 품질을 확보하기 위해, 전체 운영 과정 중에 있어서, 그들은 엄격한 분담을 통한 관리제도를 수립했을 뿐만 아니라, 생산·공급·소비의 일체화된 공정을 채택했다. 제일 먼저, 푸졘성(福建省), 쟝시성(江西省), 후베이성(湖北省), 후난성(湖南省)등의 차 생산지에서 현지조사를 진행한 이후, 차산(茶山)을 구매한 이후, 담당자가 책임지고 (찻잎) 채취를 감독했으며, 경험이 풍부한 장인을 초빙해 가공을 해 전차(?茶)를 만든 뒤에, 상자에 포장해서 한커우로 운송하였다. 그런 후 자신들의 낙타 상단을 이용해 판청(樊城)과 서치진(社旗鎭)을 거쳐 산시의 루안(潞安) 및 타이위안(太原) 등지에 도착한 이후 다시 장쟈커우(張家口)로 운송했다. 장쟈커우에 도착한 뒤, 가장 먼저 담당자가 품종과 수량을 철저히 검수한 이후, 다시 차를 조사하는 장인이 상자를 열어 차를 조사하는데, 전차(?茶)의 여섯 면 위에 있는 부스러기를 깨끗하게 솔질하고 공기를 통하게 한 후에 새로 포장해 상자에 넣은 뒤에야 자신들의 낙타 상단을 이용해 캬흐타로 운송했다. 이 같은 중간 과정의 축소는, 통일된 관리에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납품기한을 지켜 사업상의 평판을 확보하는 데에도 유리했다. 함풍(鹹豊) 연간에 강남(江南) 지역에서 발생한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창가가 무이산에서 차를 운반하는 루트가 단절되어 후난성과 후베이성의 경계지역인 양러우동(羊樓洞)과 양러우쓰(羊樓司) 일대에서 새로운 차를 재배할 수밖에 없었는데, 두 지역 차의 품질이 달랐다. 품질을 확보하기 위해, 창윈(常?)은, 전란 중임을 고려하지 않고, 직접 우이산에 가서 차 제조의 달인을 초빙했으며, 그로 하여금 차의 가공을 감독하게 했는데, 백여 차례가 넘는 테스트를 거쳐서 후베이성의 차와 우이산 차의 색과 맛 모두에서 차이를 없앤 후에야 러시아로 운송하였다. 또한 러시아 상인에게 사실대로 확실하게 말하고 맛보게 하였다. 이러한 성실한 경영 태도는 러시아 상인들을 크게 감동시켰으며, 쌍방은 지속적이며 안정된 합작관계를 세웠다.


창가가, 경영활동 중, 신용을 지키는 또 다른 방법은 의심 가는 사람은 고용하지 않으며, 고용한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위츠에는 “왕가(王家)는 돈을 받기는 어렵고 장부를 인도하기는 쉬운데, 창가는 돈은 받기는 쉬우나 장부를 인도하는 것이 어렵다”는 속담이 있다. 말하자면, 왕가와 비교하여, 창가에서는 자금을 받아 개업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창가 사람들은 어떤 사업이든지를 불문하고, 모두 아주 정통하고, 심사도 대단히 엄격해서, 근본적으로 뚫고 들어갈 만한 틈이 없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능력이 없이 농간을 부리려고 생각한다면, 창가에 와서 영업을 할 수 없었다. 다만 창가가 확신한 인재이면 그들의 지출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간섭하지도 않았다. 예를 들어  장쟈커우에 있는 창가의 유류·면·잡화점인 “톈헝위(天亨玉)”는 비교적 일찍 개업을 했는데, 마지막으로 책임을 맡은 지배인은 왕성린(王盛林)이었다. 그는 톈헝위의 운영과정 중 많은 손실을 입었는데, 창가는 그 원인을 조사한 이후, 고의적 손실이 아님을 인정해서, 그의 직위를 철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추가로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그 결과 3년 뒤에 톈헝위는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되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창가 일족이 경영하는 각종 사업들이 잇달아 실패해 위기가 발생했을 때, “톈헝위”의 자금을 빼내 빚을 갚아야 했는데, 왕성린이 자기 개인의 신용을 이용해 “다성쿠이(大盛魁)”에게서 은 4만 량을 빌려 “톈헝위”의 경영권을 확보했으며, “톈헝용(天亨永)”으로 개명을 한 뒤 책임지고 계속 운영하였다. 이후 창가가 쇄락할 때까지, “톈헝용”은 계속해서 창가의 지출을 지탱했었다. 이는 창가에서 사람을 쓰는 방법이 적절했음을 증명한다.


4 _ 창가의 쇄락


20세기 초, 제정 러시아 정부는 바이칼호 동쪽지역에서 진행되는 상업과 무역에서, 전차(?茶)를 제외하고, 나머지 상품에 대해서는 모두 과세할 것임을 선포했다. 그리고 서쪽지역에서 부과하고 있는 세금의 경우 과세 액수를 갑자기 몇 배 인상했을 뿐만 아니라, 면세품을 취소했다. 러시아는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육로통상의 관련 규정, 즉 양국 국경선 100리(裏) 내에서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임의로 파괴했다. 러시아는 세금을 대폭 높여 중국 상인들을 몰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재난의 시작에 불과했다. 곧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내전도 시작되어 모스크바 시내도 혼란스러웠다. 이 기회를 틈타 일군의 러시아 시민들이 상점들을 약탈하기 시작했으며, 진상들이 운용하는 상점들은 자연히 중요한 약탈의 대상 중의 하나가 되었다. 포성이 사라진 이후 진상들은 비로소 재산을 철저히 점검할 수 있었다. 창가의 다더위, 다메이위, 다촨위, 두선위 등의 점포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모스크바에서의 손실만 140만 냥에 달했고, 기타 각지에서의 손실은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모스크바는 일찍이 창가가 집안을 일으킨 행운의 땅으로, 매분, 매초 마다 은(銀)이 수입으로 들어왔는데, 이제는 도리어 잔혹한 악몽이 되었다.


창가의 캬흐타에서의 영업 실적도 큰 손실을 입었다. 19세기 말, 창가의 다촨위, 다성위, 두선위 등 각 점포는 기타 진상들의 상점과 연합하여, 80만 루블 상당의 홍차(紅茶), 전차(?茶), 비단(曲綢), 캐시미어 등의 상품을 다섯 개의 러시아 상점들에게 외상으로 팔았는데, 이를 은으로 환산하면 62만 냥에 이르렀으며, 매년 8리(釐)의 이자를 받았다. 당시 러시아 상인은 진상과 교환할 적절한 상품이 없었으나, 당시 창가 등의 진상들은 지나치게 자신만만하여 러시아 상인의 신용을 높이 평가했다. 20세기 초, 이들 다섯 개의 러시아 상점들은 이유 없이 갑자기 도산했을 뿐만 아니라, 창가 등 채권자들을 직접 대면해서도 조금의 수치심도 없이 도리어 당당하게 도산을 이유로 채무의 상환을 거부했다. 상인들은 어쩔 수 없어 멀리 모스크바에 가서 고소할 수밖에 없었는데, 러시아 관리들은 아무런 처리도 하지 않았다. 상인들은 또 캬흐타 현지의 러시아 관리에게 소송장을 건넨 이후, 수차례의 교섭을 거쳐 러시아측 책임자는 마침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섯 개 러시아 상점의 자산을 매각하여 채무를 갚는데 동의했다. 창가 등 진상은 서둘러 러시아에 도착했지만, 이들의 약속이 거짓이었음을 발견했다. 다섯 개 러시아 상점의 자산 중 이미 상당부분이 이미 매각 되었으며, 매각을 통해 확보한 자금 전부를 러시아 정부가 압류한 채 창가 등 진상에게는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다. 이 소송은 10여 년이나 진행되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창가의 투자금이 전체 채권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상들 중, 창가의 3대 상점의 손실이 가장 컸다. 


이 같은 괴멸적인 재난이 발생하기 전에, 창가 일족 가운데 식견이 뛰어난 사람들은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영향을 받아 기존의 상업과 무역의 범위를 벗어나 敦義和蠶桑局을 창립하였다. 주요한 기획자는 창왕춘(常望春)으로, 그는 창웨이의 제6대손이다. 창왕춘은 자기 가족의 숫자가 비교적 많고, 재산은 여러 차례 실패를 경험한 이후 줄어들기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일시에 사업이 극도로 쇠약해지면, 창가 일족들이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음을 염려했다. 이에 敦義和蠶桑局 및 敦睦織布工廠의 설립을 건의했다. 또한 베이징(北京)과 톈진(天津)에서 교수들을 초빙해, 창가 일족 중 학업을 게을리 한 자제들에게 모두 참여할 것을 권했으며, 외부로부터 견습공을 모집했다. 사전 준비가 충분했을 뿐만 아니라, 관리도 적절한 탓에, 두 번째 해에, 창가는 고향인 처왕촌 북쪽에 뽕나무밭을 열어 수백 그루의 뽕나무를 재배하는 동시에 수십만 마리의 누에를 길러 상당한 규모를 갖추었다.


敦義和가 생산한 견직물이 성 내의 판로에서 국면을 타개했으며, 핑야오(平遙)·펀양(汾陽)·원수ㆍ원수이(文水)ㆍ쟈오청(交城)ㆍ타이구(太穀)ㆍ쉬거우(徐溝)ㆍ위츠 등지의 거래처(客戶)의 반응 역시 좋아, 기업들의 구입과 판매가 모두 활발하였다. 광서(光緖) 34년인 1908년에, 창가는 자금을 조달해 敦睦織布工廠을 설립했으며, 기술을 전수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교사들을 초빙해 백여 명의 방직 노동자들을 양성하였다. 위츠현의 나이 많은 방직 노동자들 중 상당수가 창가 敦睦織布工廠 출신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안정되지 못하여, 전란이 그치지 않았고, 창가의 견직기업은 1921년에 또 한 차례의 중대한 손실을 입어 도산하였다.


5 _ 창가의 문화와 교육상의 업적


창가는 유상(儒商)으로 세상에서 유명했으며, 자녀와 가족에 대한 교육을 매우 중시했다. 창가 제10대 때에 이르러, 이미 “대대로 유학과 상업(儒賈)을 겸하는 것을 업으로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창가의 후손 중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합격하는 명예를 얻었는데, 창가 제8대인 창지(常吉)가 縣貢生에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제15대 때까지, 창가에서 邑庠生에 들어간 자가 78명에 달했다. 그 가운데 창가 제13·14 양대에서만 4명의 拔貢이 있고, 5명이 擧人 시험에 합격했으며, 1명이 진사가 되었다. 그 외에도, 창가의 자제들 중 네 명이, 1921년, 일본으로 유학을 가 학업을 마치고 귀국했으며, 10명은 산시지역 내외의 대학을 졸업했는데, 이것은 상업에 종사하는 분위기가 농후했던 산시지역에 있어서 드문 일이라 할 수 있다.


교육에 대한 중시와 신흥 문물의 흡수를 통해, 창가 일족 중에서 經史와 서예(書法) 및 회화(繪?)에 비교적 깊은 조예를 갖춘 후손들이 많이 배출됐을 뿐만 아니라, 신식 학교(學堂)를 설립하는 것은 물론이고 근대 공업을 발전시키는 것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광서(光緖) 29년인 1903년 봄, 창가의 제14대인 창린수(常麟書)의 제의와 설득에 따라, 창가 일족은 솔선하여 교육혁신을 단행했는데, 전체 일족 각 가문의 17 곳의 사숙(私塾)을 합병하여, 그해 여름에 정식으로 “常氏私立篤初小學堂”이 설립되었다. 이것은 전국에서 최초로 창립된 쟝쑤촨샤사숙개량회(江蘇川沙私塾改良會) 보다 1년이 빠르고, 위츠현의 공립 신식학교(公立新式學堂) 보다 2년이 빠르며, 민국정부(民國政府)가 반포한 《초등소학당장정(初等小學堂章程)》보다 6년이나 빠른 것이다. 1906년 가을, 篤初小學堂은 중학부(中學部)를 증설했는데, 이것은 당시 산시성 전체에서 유일한 사립 중학당(私立中學堂)이었다. 그 외에, 창린수는 또한 일찍이 위츠펑밍학당(楡次鳳鳴學堂)의 당장(堂長)을 맡았고, 그 후에는 위츠속성사법학교(楡次速成師範學校)를 창립해, 교장(校長) 및 총교무(總敎務) 겸직했다. 篤初學堂 설립 초기에는 남학생만 받아들였지만, 광서 31년인 1905에 창바오춘(常寶春)(字 鑑三) 등이 “常氏知恥女子學堂”을 설립해, 창가 일족 중 여성들도 우수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같은 뛰어난 가족교육으로 인해, 창가의 자제들 중에서는 많은 이들이 산시성 내외의 정계 및 문화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들로 성장할 수 있었다.




1) 역주: 러시아 내의 자치 공화국인 부랴트 공화국의 남부에 위치한 도시.


2) 오늘 날의 산시성 칭쉬현(淸徐)  쉬거우진(徐溝鎭).


3) 오늘 날의 산시성 칭쉬현 후춘진(湖村鎭)에 위치해 있다.


4) 역주: 명나라 홍무 3년에 시행된 세금제도이다. 명 정부는 공고를 통해 상인을 모집, 주로 국경 부근의 지정된 장소에 군량을 비롯한 군수물자를 제공하도록 했다.


5) 오늘 날의 쟝시성(江西省) 쳰산현(鉛山縣).


6) 오늘 날의 서치현(社旗縣)으로, 당시 진상들은 이 지역을 스리뎬(十裏店)으로 불렀다.


7) 역주: 낙타에게 먹이와 휴식 등을 제공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취급한 업종


8) 역주: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신하였던 범여(範?)을 일컫는 말로 도주공(陶朱公)의 준말이다. 범여는 재산을 모으는 재주가 많은 재산을 모았기 때문에, 부호의 표본으로 일컬어진다.


9) 역주: 중국 춘추전국시기 위(衛)나라의 유학자. 단목(端木)은 그의 성(姓)으로 이름은 사(賜)이며, 자는 자공(子貢)이다.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변설가(辯舌家)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부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