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邱華僑史話 (6)    중화요리점의 역사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대구·경북지역의 중화요리의 역사는 대구에 화교가 정착하기 시작한 190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조선의 중화요리 식당은 크게 세 종류가 있었다. 첫째는 비교적 규모가 큰 중화요리점이다. 주로 합자조직으로 창업하여 중국에서 요리사를 데려와 전통 중국요리를 요리하는 식당이었다. 서울의 아서원과 아관원, 인천의 공화춘과 중화루, 부산의 봉래각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중화요리점보다는 소규모이며 일반 서민을 위한 중국요리를 값싸게 제공하는 음식점이다. 셋째는 음식점보다 영세한 만두집이다. 만두집은 만두(군만두, 물만두)뿐 아니라 떠우쟝(斗醬), 여우탸오(油條), 계란빵, 팥빵, 식빵, 공갈빵 등을 제조 판매하고 중국의 명절 때 먹는 원소절의 탕위안(湯圓), 단오절의 쫑즈 등도 만들어 팔았다. 1930년 당시 중화요리점, 중화음식점, 만두집은 전국에 1,635개나 있었다.


사진1) 계란빵과 호떡을 먹을 수 있는 영생덕


대구·경북지역도 일제강점기 중화요리점, 음식점, 만두집이 모두 존재했다. 1930년 당시 이 세 종류의 식당은 모두 66개소에 달했고 이들 식당에서 일하는 요리사는 109명이었다. 1923년 당시 중화요리점으로는 경정(京町, 현 종로)에 유명화(劉明華)가 경영하는 꽤 큰 규모의 식당이 있었다. 만두집은 당시 24호가 영업을 하고 있었고 경정의 연승관(連陞館)이 유명했다.1) 1920년대 후반 대구의 주요한 식당은 금곡원(金谷園), 부흥루(復興樓), 덕화원(德和園), 군방각(群芳閣), 인성루(仁盛樓), 복생원(福生園), 동승원(東昇園), 신화각(新和閣), 취선각(聚仙閣) 등이 있었으며, 상주에도 홍성관(鴻盛館), 연승관(連陞館) 등의 음식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군 단위까지 중화요리가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2)

 
이 가운데 대구·경북 최대의 중화요리점인 군방각은 1920년대 영업을 시작하여 1960년대 말 문을 닫기까지 약 40년간 영업을 계속했다. 군방각은 요리사를 포함하여 직원이 약 20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대구·경북지역의 유지의 모임이나 결혼식, 회갑연, 칠순잔치 등이 이 식당에서 자주 열렸다.

 

대구·경북지역 화교경제의 중심이었던 포목상이 1930년대 들어 쇠퇴하자 지역 화교경제는 중화요리 음식점이 이를 대체했다. 1942년 대구중화상회 임원 37명 가운데 음식점 경영자는 28명에 달했다. 당시의 중화요리점 및 만두집은 약 26개소였다. 26개소의 상호명은 군방각(群芳閣), 부흥루(復興樓), 신화각(新和閣), 영화춘(永和春), 진성원(鎭盛園), 공화루(共和樓), 천증상(天增祥), 덕성원(德盛園), 경화루(慶和樓), 신태호(新泰號), 영풍원(永豊園), 인성루(仁盛樓), 동흥관(東興館), 평화원(平和園), 진흥원(振興園), 동해원(東海園), 동성장(同盛長), 중화루(中華樓), 경화원(慶和園), 부화춘復華春), 덕성관(德盛館), 덕원영(德源永), 영화원(永和園), 경복원(慶福園), 복경원(福慶園), 영화각(永和閣)이다.3)

 

해방 직후 대구부와 달성군의 중화요리점 및 만두집은 86호에 달했다. 한국전쟁으로 서울, 인천에서 피난 온 화교가 만두집을 새로 개업했기 때문에 50년대는 더욱 증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대구지역 화교의 직업별 분포를 보면, 중화요리업 종사 호수가 전체의 6할을 차지했다. 1962년 현재 대구·경북의 중화요리점은 303호에 달했다. 그러나 중화요리업은 서구 외식산업의 유입과 한국인 경영의 중화요리점이 증가하면서 1970년대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다. 1999년에는 대구 67개, 경북 50개로 감소했고, 2014년에는 대구 50여개, 경북 38개로 감소했다.

 

지역 최대의 중화요리점이었던 군방각은 한국전쟁 때 총경리 모문금(慕文錦)이 대만으로 일시 피난을 떠나자 그의 동생 모문회(慕文會)가 대신 경영을 했다. 모문금은 휴전 후 다시 대구로 돌아와 군방각을 경영했지만 그전에 비해 영업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4) 아마도 1960년대 초 기린원의 탄생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미군정기 한국 최대의 무역회사인 인천 만취동(萬聚東) 무역회사 출신의 이경문(李慶文)과 구비소가 1958년경 수창동의 전매청 맞은편 자리에 만생양조장을 세워 중국식 백주를 생산했던 바 있다. 


사진2) 만두 전문점 태산만두

 

이경문은 만생양조장 자리에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2층 건물의 기린원을 세웠고 2층을 증축하여 4층 건물로 만들었다. 기린원은 현대식 시설과 유명한 조리사의 요리기술, 친절한 서비스,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식후에 손님이 직접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무료로 제공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5) 군방각은 시설이나 서비스면에서 기린원에 뒤졌기 때문에 점차 경쟁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린원도 쇠퇴하여 지금은 덕영대반점으로 상호를 바꿔 운영하고 있다.   

 

대구·경북의 중화요리점은 이전에 비해 많이 감소했지만 지역 주민의 사랑을 받는 화교 경영의 중화요리점이 적지 않다. 대구 한일극장 근처에서 해랑(海浪)으로 출발한 태산만두는 만두 전문집이다. 4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태산만두에서는 만두전문점답게 고기왕만두, 군만두, 찐교스, 탕수만두, 만두국, 해물만두국 등 다양한 만두를 맛볼 수 있다. 40년의 역사를 가진 영생덕(永生德)은 중화요리 전반의 요리뿐 아니라 중국전통의 계란빵, 호떡 등을 맛볼 수 있는 대구 유일의 식당이다. 중화반점(中和飯店)은 50년 전에 개업하여 야끼우동의 원조로 유명하다. 1971년 개업한 복해반점(福海飯店)은 주인이 몇 번 바뀌었지만 지금은 미국에 이주했다 다시 돌아온 화교가 요리를 하고 있다. 나이가 좀 있는 중년의 화교들이 좋아하는 중화요리점이다. 이외에도 인화반점, 서태후 등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중화요리점이다.

 

 


1)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朝鮮に於ける支那人』(조선의 중국인), 1924년, 136쪽.


2) 大邱華商公會, 「本會成立建築及聯關一覽表」, 대구화교협회소장, 1930년. 목판 자료.


3) 1942年, 駐釜山領事館報告, 『汪僞僑務委員會?案』 (中國第二歷史?案館所藏, 소장번호 2088-569).


4) 2016년 3월 12일 복해반점에서 南新明(전 대구화교중학 교사), 蕭相瑗(전 대구화교협회장)씨 인터뷰.


5) 미국 거주 徐國勳 전 대구화교소학 교장의 서면 인터뷰(2005년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