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화요리, 그 ‘식(食)’과 ‘설(說)’ (16)

호병가(胡餠家)에서 호떡을 찾다

주희풍 _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우리가 먹는 호떡이 중국 후빙(胡餠)에서 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지금의 호떡은 일반적으로 밀가루와 찹쌀을 섞은 반죽에 계피맛 흑설탕과 견과류 등의 소를 채운 다음, 기름을 두른 철판에 누르개로 눌러 구워낸다. 소위 ‘기름호떡’이라고도 하는 이 호떡은 1992년대에 와서야 지금의 모습을 띠게 된다. 그 이전에는 밀가루로 빚은 반죽에 흑설탕만을 채워 기름에 구운 것이 고작이었다.1) ‘기름호떡’은 노점 포장마차에서 구워 파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호떡을 언제부터 만들어 먹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60년대에 들어와서 생겨난 듯하다. 1969년 5월 22일자 동아일보 6면 사회 기사 <슬프지 않는 가난>을 보면 아래와 같이 노점에서 호떡을 팔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오늘도 염춘교 저쪽 전봇대를 기둥삼아 숫오리를 펴놓고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옆자리의 호떡장수아저씨 딸애가 숫오리를 달라고 졸라댄다. 저쪽 처지도 선뜻 이십오원을 내놓고 사랑하는 딸애에게 숫오리새끼를 사줄 형편이 못된다.…”2)


위 내용의 “호떡장수아저씨”는 노점상 상인인 것으로 추정되며 ‘기름호떡’을 파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소설가 홍성원(1937~2008)3)이 1973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따라지 산조>를 보면,


“시간이 아직 열시 밖에 안됐으니 차씨는 만화가게 골목에서 오늘도 열심히 호떡을 굽고 있을 게다.…호떡을 굽던 차씨네의 리어카가 포장을 뜯어내고 이사짐 운반 도구로 등장했으며….”4)


위 내용에서도 당시 ‘기름호떡’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노점 포장마차에서 팔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같은 시기에는 대중들에게는 또 하나의 호떡집이 있었으니 바로‘胡餠家(호병가)’5)이다. 호병가는 호떡을 파는 ‘호떡집’의 한자표기다. ‘호떡집’이란 과거 한국의 화교상인들이 운영하는 중국식 과자(菓子)나 중국 빵 그리고 만두 따위를 파는 가게를 말하는데, 한국의 화교들은 ‘호떡집’을 ‘궈쯔지아(?子家)’나 ‘바오쯔푸(包子鋪)’라고 부른다. ‘궈쯔(?子)’는 중국식 과자(菓子)를 말하기도 하지만 중국의 대표적인 아침 식사로 먹는 요우티아오(油條)를 가리키기도 한다. 당시 화교들은 요우티아오를 궈쯔라고 불었다. 때문에 ‘호떡집’을 ‘궈쯔지아’라고도 한다. 진유광(번역본, 2009:125)에 따르면 1920년대에 한국 전역에는 대략 400여 가구의 ‘호떡집’이 있었으며 5~6종류의 호떡을 팔았다고 한다. 진유광(번역본, 2009)의 책에서 언급된 ‘호떡’은 지단빙(?蛋?), 주화빙菊花?, 가오빙(??), 탕훠샤오(糖火燒), 강터우(?頭), 쯔마빙(芝麻?), 탕구쯔(糖鼓子) 모두 7종류지만, 한국 화교 2~3세대의 기억에 따르면 러우훠샤오(肉火燒), 수훠샤오(素火燒), 차아쯔훠샤오(叉子火燒)등도 많이 팔았다고 한다. 



지단빙(?蛋?)


탕구쯔(糖鼓子)

 


주화빙(菊花?)


쯔마빙(芝麻?)

 


가오빙(??)


러우훠샤오(肉火燒)

 


수훠샤오(素火燒)


차아쯔훠샤오(叉子火燒)

 


강터우(?頭)


탕훠샤오(糖火燒)


호떡은 중국 후빙(胡餠)에서 왔고, 중국 후빙은 개화기 한국에 정착한 중국 화교에 의해 만들어졌다. 후빙은 초창기의 샤오빙(燒餠)이다. 한(漢)대 반초(班超32~102)6)가 서역에 다녀와서 전해진 음식이다. 《속한서續漢書》에는 “靈帝好胡餠(영제는 호병을 즐겨먹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중당(中唐)시대의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시 〈寄胡餠與楊?萬州〉가 있을 정도로 당시 후빙은 대중들이 즐겨먹는 음식이었다.


胡麻餠樣, 學京都。이 참깨병은 경도(京都)풍으로 만들어져

麵脆油香, 新出爐。화로에서 바로 꺼내니 바삭바삭 구워진 것이 기름 냄새가 향기롭다.

寄如餠?, 楊大使。먹고 싶어 하는 귀한 님 양대사(楊大使)에게 드려

嘗看得似, 輔興無。고향인 보흥(輔興)의 호병 맛과 비슷한지 맛보아라.


샤오빙과 훠샤오(火燒)를 구분하는 뚜렷한 기준은 없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화교사회에서도 샤오빙과 훠샤오를 명확하게 구분하지는 못한다. 崔岱遠(2009)은 샤오빙과 훠샤오의 차이를 굽는 방식에서 찾는다. 샤오빙은 재래식 오븐에서 굽고 훠샤오는 철판에 굽는다고(이 때 철판에 기름을 바르기도 한다) 한다. 다시 말해 샤오빙은 뒤집지 않고 굽는다면 훠샤오는 뒤집으면서 굽는다.

  

한편, 한국의 화교 2세(50세 이상)까지는 샤오빙보다는 훠샤오에 대한 향수가 상당하다. 이구동성으로 훠샤오가 샤오빙보다 더 맛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러우훠샤오, 수훠샤오, 탕훠샤오가 더욱 그렇다고 한다. 화교 2세대의 기억에 따르면 “밀가루를 더운물에 반죽하여 발효와 숙성을 시킨 다음 만두 밀대로 반죽을 넓게 밀어 펴고, 그 위에 ‘요우수(油?, 돼지기름과 밀가루를 1:1비율로 섞어 만든 것)’를 얇게 바르고 둘둘 말아서 한입 크기로 떼어내 고기나 야채 혹은 흑설탕의 소를 채운 후 굽는다고 한다.” 그래서 “훠샤오는 반죽이 겹겹이 되어 겉은 바삭하면서도 속은 부드럽다”고 한다. 훠샤오는 소에 따라 명칭이 다른데 소가 고기면 러우훠샤오, 야채면 수훠샤오, 흑설탕이면 탕훠샤오가 된다. 필자가 인터뷰한 대부분의 화교 2세들은 “탕훠샤오가 지금의 ‘기름호떡’의 원조 격”이라고 덧붙였다. 진유광(번역본, 2009:126)의 책에서도 “한국인들이 말하는 호떡은 모든 과자류를 포함하지만, 그 중에서도 ‘당화소’가 한국인들의 입맛에 가장 맞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당화소’를 지칭한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당화소’는 탕훠샤오이다.

  

崔岱遠(2009)의 책에서 “훠샤오는 철판에 굽고”, 화교2세들의 “탕훠샤오가 ‘기름호떡’의 원조”라고 한 것, 그리고 진유광(번역본, 2009)의 책에서 “한국인들이 말하는 호떡은 대부분의 경우 ‘당화소’를 지칭한다”라고 한 것을 고려할 때, ‘기름호떡’은 탕훠샤오에서 왔다는 심증이 든다. 대체로 기름진 음식을 싫어하는 한국사람들의 식습관으로 보았을 때 탕훠샤오가 기름진 ‘기름호떡’으로 변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인터뷰와 자료 조사를 하는 내내 들었다. 1960년대의 기사가 이 의문에 답을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그 개연성은 충분해 보인다.


 

1961년 6월 11일 자 경향신문 4면 생활/문화 소설 〈일요부인(日曜夫人)〉 27 7)


1961년 경향신문의 연재된 유호(兪湖)의 소설 〈일요부인(日曜夫人)〉 27회이다. 아래는 내용의 일부다.


“…집으로 돌아오면,미스터·손과의 세상―빈대떡이고 호떡이고는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들만의 시간을 즐겼다. 이튿날―. 빈대떡집 개업의 날이다. 신여사는자신있게 빈대떡판앞에 앉았다.…”


위 내용은 주인공인 ‘송여사’가 빈대떡 가게를 개업하려고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집으로 돌아오면 ‘미스터 손’과의 세상에 빠져 빈대떡이고 호떡이고 까맣게 잊어버린 채 그들만의 시간을 즐긴다는 내용이다. 빈대떡 가게 개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호떡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당시 빈대떡 가게에서 호떡도 같이 팔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빈대떡을 부치는 철판 그리고 철판 위에 넉넉하게 두른 기름이 더욱 그런 생각을 갖게 한다.

  

지금 한국의 화교사회 그 어디에서도 훠샤오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유사하게나마 탕구쯔를 볼 수 있는데 탕구쯔는 훠샤오가 아닌 샤오빙에 속한다. 탕구쯔의 정확한 이름은 ‘탕구쯔샤오빙(糖鼓子燒餠)’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갈빵’이다. 공갈빵이 지금까지 화교사회에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수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논리로 훠샤오는 그 수요가 없어 화교사회에서 사라졌다.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기름호떡’은 ‘잡채호떡’, ‘고기호떡’, ‘씨앗호떡’ 등으로 파생되어 훠샤오와는 다른 종류의 음식이 되었다. 한류의 열풍을 타고 ‘기름호떡’은 중국과 대만으로 역수출 되어 ‘한국 헤이탕시안빙(韓國黑糖?餠)’으로 번역된다. 훠샤오가 호떡으로 번역된 것과 완전히 다른 형태의 번역이다. 1900년대에 호떡은 중국 쿠리(苦力, 노동자)들의 허리춤에 배고픔과 눈물의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며, 1920~1950년대에 호떡은 화교들에게 이국땅에서의 희망과 부(富)의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며, 1960년대의 ‘기름호떡’은 가난과 싸우는, 서러움을 이겨내는 아픔으로 남았을 것이다. 다시 한류를 사랑하는 중국사람들에게 ‘한국 헤이탕시안빙’은 어떤 음식으로 느껴질까? 또 ‘한국 헤이탕시안빙’은 중국에서 어떤 형태로 변하게 될까?


한국화교들이 가장 사랑했던 탕훠샤오, 자칫 기억 속에서조차 사라져버릴 수 있는 탕훠샤오를 만드는 과정을 화교 2세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사진으로 남기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들 중 몇 분들이 탕훠샤오를 만들 때 꼭 지켜야 한다면서 필자에게 당부한 말이 있다. “탕훠샤오의 소를 만들 때는 흑설탕에 반드시 밀가루를 섞어야 먹을 때 설탕물이 주르륵 흘러내리지 않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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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진유광(번역본, 2009) 진유광 저, 이용재역, 《중국인 디아스포라 한국화교 이야기》 , 한국학술정보(주).

崔岱遠(2009), 췌이다이위안 저, 《京味兒》, 生活, 讀書, 新知三聯書店.



이 글에서 인용된 사진의 출처는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 http://blog.naver.com/

* 부산 차이나타운에는 삼생원(三生園) 제공

* http://image.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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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http://newslibrary.naver.com/)

*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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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4년 1월 21일 자 경향신문 10면 광고 기사(칼럼/논단) “내고향 身土不二(신토불이) 찹쌀호떡개발” 내용 참고.


2) 당시 사용되던 띄어쓰기와 맞춤법으로 그대로 옮겨 썼다.


3) 경남 합천 출생(1937~2008)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병점지대>, 《세대》에 <기관차와 송아지>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주요 작품으로 <디, 데이의 병촌>, <타인의 광장>, <프로방스의 이발사>, <주말 여행>, <이인삼각>, <육이오>, <따라지 산조> 등이 있음.


4) 당시 사용되던 띄어쓰기와 맞춤법으로 그대로 옮겨 썼다.


5) 호병가(胡餠家), 또는 호병상(胡餠商)은 1920년대 ‘호떡집’의 한자 표기이다.


6) 자는 중승(仲升). 반고의 동생으로, 31년간 서역에 머물며 흉노의 지배 아래에 있던 서역 국가들을 정복하여 후한의 세력권을 파미르 지방의 동서(東西)에까지 넓혔으며, 그 공으로 정원후(定遠侯)에 봉하여진 인물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참고.


7) 유호(兪湖, 1921~ ) 소설가, 극작가. 1947년 단편 《먹》을 〈백민(白民)〉에 발표, 이후 《나를 기억(記憶)하십니까》(白民, 48)등 많은 단편을 발표했다. 해방 후 대중가요의 가사(歌詞)를 비롯하여 많은 소설 · 시나리오 · 라디오드라마를 썼다. 주요작품으로 장편 《일요부인(日曜夫人)》, 《우리엄마 최고(最高)야》, 《맹선생행장기(孟先生行狀記)》(한국일보, 55. 9~56. 3), 《0호(號) 부인(夫人)》, 《나비》, 《잡았네요》 등 대중 유머소설이 있다. 제3회 내성문학상(來成文學賞)(57), 제1회 방송문화상(放送文化賞)(68)을 받았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유호 [兪湖]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