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학술원소장 사진자료 소개: ‘인천시민의 날’과 인천화교

이민주 _ 중국학술원 연구코디네이터

     

지난 호까지 총 3회에 걸쳐 인천화교사회의 기념행사를 다루었다. 이번 호에서는 ‘인천시민의 날’ 행사에 참여한 인천화교들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1960년대 들어 한국의 각 지역에서는 시민들의 애향심과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앞 다투듯 ‘시민의 날’을 제정하여 각종 행사를 진행하였다. 인천에서도 1965년부터 6월 1일1)을 ‘시민의 날’로 결정하고, 자유공원 광장에서 ‘제1회 시민의 날’을 거행하였다. 이후 ‘시민의 날’은 1968년부터는 ‘항도제(港都祭)’와 겸해서 진행되었고, 이후에는 ‘제물포제’로 통합되어 치러졌다.


<사진 1> 제4회 인천시민의 날과 항도제(港都祭)


1974년부터 인천항 갑문식 도크(仁川港船渠)의 준공을 기념하여 5월 10일을 ‘시민의 날’로 변경하였다. 이는 ‘시민의 날’이 제정된 지 10년 째 되는 해로, 이 ‘제10회 시민의 날’ 행사는 온 인천이 떠들썩하게 진행되었다.


<사진 2>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시민위안의 밤


위 사진 속 인천공설운동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모습이 인상 깊다. 당시는 문화공연이 별로 없기도 했고, 시민 동원활동이 활발했던 시대였기에 ‘시민의 날’이 매우 성대하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는 보기 힘든 광경임에는 틀림없다.


이날 행사에는 인천화교들도 참여하였다. 인천화교들은 ‘한국인천화교협회(韓國仁川華僑協會)’라는 깃발과 함께 태극기와 청천백일기를 높이 들고 거리퍼레이드에 함께 했다. 또 인천화교학교의 학생들은 화려한 용춤을 비롯하여 사자춤, 악대 공연, 1인 인형극 공연(老背少) 등 다채로운 문화공연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사진 3> 거리 퍼레이드


<사진 4> 용춤

<사진 5> 1인극 老背少


인천화교들이 준비한 공연은 그 여느 때보다 화려하고 다양했다. 사진으로만 봐도 인천화교들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을지 짐작이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1960년대는 그 어떤 시기보다 한국사회의 화교 통제와 압박이 심했던 시기이다. 특히 많은 화교들은 중식당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할 행정부서와의 관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화교의 입장에서 인천시민이 모두 참여하는 이런 행사를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인천에 뿌리를 내린 인천화교들로서 인천시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전폭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만, 그 모습에 다소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1) 일본인에 의해 편찬된 조선사대계(朝鮮史大系)에는 인천의 실질적인 개항이 1883년 6월부터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