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영화 [색·계]의 뒷이야기

임우경 _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드물게 헐리우드에서 성공한 동양인 스타 감독,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뭇 여성들의 로망 량차오웨이(梁朝偉), 파격적인 정사장면 등, 리안(李安)의 영화 ?색·계?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그러나 중국에서 ?색·계?는 더 각별하다. 그 원작이 장아이링(張愛玲)의 동명소설이기 때문이다.1) 장아이링은 타이완에서 현대문학의 ‘대모’로 떠받들려지는 작가다. 한 때 그녀의 이름조차 찾아볼 수 없던 사회주의 중국에서도 그녀는 지금 루쉰(魯迅)보다 더 사랑받는 작가이자 상하이 노스탤지어를 형성하는 대중문화의 최첨단 부호로 소비된다. 전기(傳奇)에 가까운 그녀의 삶과 문학의 부침은 중화제국의 몰락, 식민/탈식민, 냉전/탈냉전을 거쳐 온 20세기 동아시아의 역사 그 자체이다.

 

그리하여 ?색·계?는 그저 잘 만든 영화로만 남지 않는다. ?색·계?의 실제모델이었다는 쩡핑루(鄭?如)와 띵모춘(丁?邨) 사건2), 원작자인 장아이링과 그 첫 남편 친일파 후란청(胡蘭成)에 대한 역사적 관심은 어느덧 목전 중국의 사회문제와 결합되고 급기야 젊은 좌파들이 주도하는 매판자본 비판과 민족주의 논쟁으로 번지고 있다. 비판의 출발은 ?색·계?가 민족의 영웅들을 희화하는 한편 동포를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민족반역자를 미화했다는 데 있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영화를 아무런 비판 없이 얼씨구나 선전하고 찬양하는 주류매체이고 그것을 조장하는 정부이며 더 나아가 개혁개방 이래 심화된 시장주의와 매판주의가 전체적으로 그런 사회분위기를 꾸준히 만들어왔다는 데 있다.


그런데 이들 좌파의 비판은 지극히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민족주의와 결합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색·계?에 대한 민족주의적 비판이 그처럼 쉽게 여성에 대한 폭력적 언설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은 ?색·계?가 그야말로 ‘색’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과 관련된다. 리안의 영화에서 ‘색’은 확고한 경계로서의 ‘계’를 무너뜨리는 핵심적인 장치이다. 주인공 왕지아즈(王佳芝)와 이(易) 선생의 격렬한 정사, 그 억압된 두 육체의 결합은 피학과 가학, 연극과 현실, 증오와 사랑, 적과 아,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모두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경계의 지워짐은 자본주의 전지구화 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징후이다. 영화 ?무간도?나 드라마 ?개와 늑대의 시간?처럼 경계의 불분명함 속에서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개인들의 불안은 오늘날 이미 낯익은 주제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색·계? 비판자들의 불안은 주로 적과 아, 내부와 외부 경계의 허물어짐이 바로 자기 내부의 여성에게서 온다는 점에 집중된다. 그 불안이 곧 자기를 강간한 적과 되려 사랑에 빠지며 그 적을 살리기 위해 감히 내부를 희생시킨 여자에 대한 분노와 비난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친일파 후란청을 사랑했던 장아이링은 자연스럽게 ‘그런 여자’로 해석되고, ?색·계?는 작가 자신의 타락한 영혼에 스스로 부여한 면죄부라고 비난받는다. 나아가 민족의 (잠재적)배신자 여성에 대한 비난은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몸’을 바친 여성들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실제 미인계로 간첩활동을 하다 사형당했다는 쩡핑루나 일본군에게 윤간당하고 죽은 여자 팔로군이 갑자기 ‘민족영웅’으로 찬양된다. 그들의 민족주의적 분노와 비판 속에서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민족/국가의 점유는 당연한 것으로 칭송되는 것이다.


그런데 장아이링의 입장에서 볼 때 좌파들의 비난은 아무래도 억울하지 않을 수 없다. 리안의 영화가 ‘색’을 통해 모든 경계를 넘는 휴머니즘을 추구했다면, 장아이링의 소설은 민족의 이름으로 여성의 ‘색’을 소비하는 남성들의 나르시시즘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왕지아즈는 “여자의 마음으로 가는 길은 질(陰道)”이라는 말을 부정한다. 임무를 위해 애국사단 동료에게 정조를 바쳤지만 남은 것은 그 남자에 대한 혐오와 동료들의 비웃음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결정적인 순간에 이 선생을 놓아준 것도 그를 사랑해서라기보다는 그 순간 그의 쓸쓸한 표정이 적어도 자신의 ‘질’을 아무렇게나 도구화하고 비웃던 애국사단 동료들보다는 훨씬 더 진실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아가 작가는 왕지아즈의 죽음마저 자신의 ‘궁극적인 소유’로 전유하는 이 선생의 이기적인 나르시시즘도 조롱해 버린다. 장아이링에게 ‘색’은 ‘계’를 넘어서는 위대한 인성이 아니라 ‘계’에 갇힌 ‘색’, 즉 남성사회의 기율에 갇힌 여성의 섹슈얼리티였던 것이다. 만약 장아이링이 살아서 ?색·계?를 둘러싼 논쟁을 지켜봤더라면 반세기가 지나도록 여전한 세상에 장탄식을 하지 않았을까?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http://me2.do/50HEEmuh




1) 장아이링의 소설 ?색·계?는 1950년에 초고 작성, 1978년 타이완 <中國時報>의 <人間副刊>에 정식 발표.


2) 1939년, 당시 상하이 사교계의 꽃이었던 23세의 쩡핑루가 왕징웨이(汪精偉) 친일정부의 첩보기관 고관이었던 띵모춘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 그 사건으로 쩡핑루는 바로 사형당하고 띵모춘은 일본패전 후인 1947년 전범재판을 받고 사형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