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川華僑史話(4)    인천 화상(華商)의 쇠락의 원인

이정희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인천 화교의 무역업과 상업은 중일전쟁기의 침체를 벗어나 미군정기에 일시적으로 번성한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1948년 8월 수립되면서 인천 화교의 무역업과 상업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 원인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으로 한국과 중국 대륙 간의 사람, 물건, 돈의 이동이 제약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며, 그 다음으로는 한국 정부의 화교에 대한 각종의 규제와 탄압이었다. 당시 인천화교는 그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고, 그 원인을 어떻게 분석하고 있었을까. “인천화교협회소장” 자료 가운데 인천중화상회가 1949년 10월 작성한 ‘인천중화상회 보고의 화상 개황 의견서’는 상기의 문제에 답을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림 ‘인천중화상회 보고의 화상 개황 의견서’의 일부 내용


이 의견서의 두 번째 토픽은 ‘화상의 쇠락 개황’에 관한 것이다. 먼저 ‘화상의 쇠락 개황’ 보고서 전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번역문|

화상의 쇠락 개황

 

한국 인민의 일상 필수품은 많은 것을 우리나라에 의존했다. 마포, 면화, 붉은 대추, 붉은 고추 및 포(布)류가 수입의 대종을 이뤘다. 일본의 수입세율 인상과 산업의 적극 진흥으로 인해 모든 수출품의 품질은 좋고, 가격이 싸지 않은 것이 없었다. 우리나라의 상품은 그 저지를 받아 무역은 점점 쇠락했다. 중일전쟁 이후 화상은 일체의 이권을 상실 혹은 거의 잃어버렸다. 전승 이후 미군 점령 시기에 비록 임시적으로 통상을 할 수 있었으나, 상품 교역은 원칙적으로 한국의 생산 낙후로 교역 가능한 상품이 전혀 없었다. 동시에 우리나라의 세관은 왕래하는 한국 선박에 대해 엄격한 제한을 가하여 늘 억류를 당했다. 이로 인해 화상이 소형 선박으로 계속해서 국내에서 땅콩 알맹이, 땅콩기름, 콩기름, 참깨 등을 선적하여 운송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본다. 수입하는 것과 그 수입량도 이전의 중한(中韓)무역에 비해 상당한 차이가 난다. 다만 일반 교상(僑商)의 다수가 피난으로 이곳에 이주했는데, 이것으로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정부 성립 이후 이러한 종류의 상품에 대해 수입을 금지했지만, 식염 수입은 금지품에 들어가 있지 않다. 다만 자유롭게 판매 할 수 없는데, 반드시 전매국의 공정가격에 근거하여, 반드시 수개월 후에 비로소 지불을 요청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화상은 겨우 생존할 수 있고, 단절의 위기에 빠져 있다. 지난해 왕흥서(王興西) 대표가 뤄양(洛陽)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 참가했을 때 우리 정부에 대해 다시 임시통상판법의 개선을 소리 높여 요청했는데, 우리 정부는 이를 수용하여 사정을 참작하고 기간을 고려하여 처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하이, 칭다오, 옌타이의 국군은 잇따라 철수하여, 홍콩 이외에는 활동할 지역이 없다. 화상은 홍콩에서 고무원료, 타닌엑스(tannin extract), 종이류, 면사, 염료, 옷감, 자동차, 솜, 탄산소다, 베이킹소다 등의 상품은 수입할 수 있으나, 관세가 매우 가혹하여 이윤이 매우 박하다. 세관 및 각 기관의 불법적인 일의 지체에는 속수무책이다. 야채 재배를 하는 농민의 다수는 한국인의 농지를 빌려 경작한다. 이전에는 시기가 되면 농지 차지료를 지불했는데, 지금은 지주의 다수가 생산량에 따라 차지료를 받는다. 차지료 증가의 변화된 양상은 실로 배척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 나머지는 소수의 판매 상인과 보부상을 제외하고는, 음식점 경영자가 많다. 일본의 항복 초기 한인(韓人)은 미친 듯이 기뻐하고 미친 듯이 마시고 하여 일시적으로 영업이 좋았지만, 점차 한산해져 지금은 손해를 봐서 파산(破産)할 위기에 빠져 폐업하는 자도 있다고 한다.1) 


이 문서는 인천중화상회가 중일전쟁 시기 화상의 경제활동에 대해서는 “화상은 일체의 이권을 상실 혹은 거의 잃어버렸다.”고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미군정기의 화상의 경제활동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무역활동을 제약하는 몇 가지의 요인을 들고 있다.

첫째, 한국에서 중화권으로 수출할 상품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미군정청은 수출과 수입을 연계하는 정책을 펼쳐, 수입의 쿼터를 확보하려면 수출을 많이 해야 했다. 그러나 한국의 수출물자는 수산품 이외에는 없었다.


둘째, 중국 정부는 국공내전 때문에 중국 연안에 접근하는 무역선박에 제한을 가하여 자주 선박을 억류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중국산 물자의 한국으로의 운반은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셋째, 일제시기에 비해 한중 무역량은 많이 줄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1920년대에 비교해서 그럴 것이며, 중일전쟁 시기에 비교하면 많을 것이다.


넷째, 화교 인구의 증가로 화상의 경제가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인구 증가로 인해 화상 경영의 각종 상점과 요리점 등이 큰 수입을 올리고 있었던 것을 말하는 것이다.


‘화상의 쇠락 개황’은 한국 정부 수립 이후 화상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첫째, 한국 정부는 식염 이외에 땅콩 알맹이, 땅콩기름, 콩기름, 참깨 등의 수입을 금지하였고, 식염도 정부의 전매제도로 인해 수입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정식 무역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아, 무역하는데 많이 불편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1946년에 체결된 ‘중조임시통항무역판법’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었다.


셋째, 장제스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에 패전하여 대만으로 정부를 이양, 공산화된 중국 대륙과의 무역의 길이 닫혔다는 것이다.


넷째, 홍콩에서 수입하는 물자에 대한 관세가 가혹하여 화상에게 큰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세관을 비롯한 한국 관청의 불법적인 행태도 화상의 무역활동을 저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술한다.


인천중화상회가 지적한 네 가지 원인은 크게 한국 정부의 대 화상 정책이 엄격해졌다는 것과, 중국 대륙의 공산화로 인해 교역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한국정부는 한국 무역의 7할을 장악하고 있던 화상의 무역업에 불리한 각종 규제를 발표했다. 한국정부는 1949년 2월 수입쿼터제를 실시하여 한국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은 양만큼 수입할 수 있게 되어 상대적으로 화상 무역상에게 불리했다.


또한 한국정부는 1949년 6월 대통령령 123호로 ‘대외무역 기타 거래의 외국환취급규칙’을 공포하여, 수입용 외환은 민간무역의 수출에서 획득한 것 이외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수출 실적이 부족한 화상 무역상에게 불리한 규칙이었다. ‘화상의 쇠락 개황’ 작성 한 달 후인 11월, 한국정부는 새로운 관세법을 공포하여, 한국 국적이 아닌 외국인(화교)에 의한 보세창고 관리는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한국정부는 새로운 관세법 공포 직후인 12월, 화상 무역상의 보세창고를 봉쇄하고 상품의 소유주인 화교 60명을 구류처분 했다.2)


한편, 이러한 조치의 배경에는 화상 무역회사에 의한 밀무역의 성행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만취동 등도 이런 밀무역에 연루되어 책임자가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3) 세관에 적발된 화상의 밀수 건수는 1946년 36건, 1947년 36건, 1948년 50건이었으며, 이는 전체 적발된 건수의 55.4%, 11.1%, 21.4%를 차지했다.4) 이처럼 화상의 밀무역이 매우 성행하여 한국 사회에 큰 문제가 되자, 샤오위린(邵毓麟) 주한중화민국대사는 1949년 12월 10일과 11일 전국의 화교대표 160명을 소집한 회의에서, “모든 재한화교는 한국의 법률을 지켜 한국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한국의 법률을 어기는 자는 처벌을 받거나 이 나라에서 추방될 것”이라고 말했다.5)


또한 화교의 이동을 규제한 1949년 11월 공포의 ‘외국인 입국·출국과 등록에 관한 법률’은 화교의 대중 무역을 원천적으로 차단했으며, 중국인의 한국 이주의 길을 막아버렸다. 물론 이 법률은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관련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화교의 사회경제활동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화상의 쇠락 개황’에 따르면, 화상만이 아니라 화농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일제시기 화농은 한국인과 일본인으로부터 토지를 빌려 야채 재배를 하고 약속한 차지료를 지불했다. 그런데 해방 초기가 되면 한국인 지주가 생산량에 따라 차지료를 요구하여 실질적으로 차지료가 인상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한국인 지주의 조치에 대해 “실로 배척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1) ‘화상의 쇠락 개황’, <인천중화상회 보고의 화상 개황 의견서>, 『인천중화상회 보고서』(인천화교협회소장).


2) 王恩美 (2008), 『東アジア現代史のなかの韓國華僑: 冷戰體制と「祖國」意識』, 三元社, 208-211쪽. 이 책은 송승석에 의해 2013년 학고방에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3) 「中共에 油類 提供 在仁川華商의 密輸 跳梁」, 『商業日報』, 1948년11월23일.


4) 조선은행조사부, 앞의 자료 (1949), Ⅱ-61쪽.


5) From American Embassy, Seoul to Secretary of State, Records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 relating to the Internal Affairs of Korea, December 19, 1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