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川華僑史話(3)    해방 초기 인천화교 사회단체의 변화

이정희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인천화교협회 소장자료 가운데 인천중화상회가 1949년 10월 인천 화상의 경제활동에 대해 보고한 ‘인천중화상회 보고의 화상 개황 의견서’는 해방 초기 인천 화교 사회와 경제를 파악하는 데 매우 귀중한 문서다. 이 문서는 ‘화상의 조직과 연혁 개황’, ‘화상의 쇠락 개황’, ‘한국 관청의 화상에 대한 정책’, ‘화상이 정부의 보호를 희망하는 의견’ 등의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서를 통해 인천중화상회가 분석한 해방 초기 인천 화교의 실태를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인천중화상회는 ‘화상의 조직과 연혁 개황’에서 인천화상상회가 1935년에 보고한 화교단체 소개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1935년 이후부터 1949년 10월까지의 인천 화교단체의 소개를 추가했다. 그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화상의 조직과 연혁 개황’(번역문)

七七事變(중일전쟁) 후 일본인은 다시 화상의 입국을 제한했다. 승전 이후부터 지금까지 정식으로 통상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전의 화상 단체 가운데 상회, 농회, 반업공회(飯業公會) 및 산동회관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정돈(停頓)상태에 있다.…(인천화상상회는) 지금은 법에 의거하여 다시 이사제로 바뀌었다. 화교의 공·상업 및 일체의 사안은 이전 거의 상회에 의해 처리되었다. 지난해부터 화교는 자치(회)를 개최한 이후 자치구공소에서 사무를 분담하고 상호 협력하기 시작했다.1)


먼저, 중일전쟁 후 다시 화상의 입국을 제한했다는 것은 조선총독부가 중국에 귀국한 조선화교의 입국을 제한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중일전쟁 승전 이후 ‘정식으로 통상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의 의미는 앞에서 살펴 본 대로 한국과 중국 간에 정식 무역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 그리고 상회, 농회, 반업공회, 산동회관을 제외한 모든 단체는 거의 활동을 하지 않는 상태에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중일전쟁 시기에 있었던 남방회관, 원염조합, 간어판매중개인조합 등 제 단체는 사라진 것 같다.

  

1949년 현재 실존하고 있던 화교단체에 대해 살펴보자. 인천화상상회는 해방 직후 ‘인천중화상회’로 바뀌었다. 그러나 인천화상상회는 1948년 7월 거류민단의 성격을 가진 인천화교자치구공소가 조직된 이후는 거류민단의 행정업무는 자치구에 이양하고, 주로 상공회의소의 기능만 맡게 되었다.2) 상기의 문서에 “지난해부터 화교는 자치(회)를 개최한 이후 자치구공소에서 사무를 분담하고 상호 협력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은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1949년 현재 인천중화상회의 회장은 만취동의 강무정 사장이 맡았는데, 그는 인천화교자치구공소의 회장도 맡고 있었다. 인천중화상회와 인천화교자치구공소의 두 개 단체로 분리되었지만 같은 사무실을 사용하고 있었고 같은 인물이 회장을 맡고 있기 때문에, 분리의 의미는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1913년 새롭게 설립된 인천중화상무총회와 기존의 인천중화회관과의 관계와 유사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1949년 당시 인천중화농회는 구우성(救牛成)이 회장을 맡고 있었으며, 야채 재배에 종사하는 화농에게 본국으로부터의 종자 알선, 비료 배급, 기타 농사개량 등의 사무를 봤다. 화농의 경작지 면적은 약 22.2만 평으로, 재배하는 야채는 양배추, 배추, 호박, 가지, 무, 시금치, 파 등이었다. 해방 이후는 화농이 재배한 야채의 주요한 수요자였던 일본인이 본국으로 귀국했기 때문에 수입은 이전보다 좋지 않았다고 한다.3)

  

인천중화반업공회(仁川中華飯業公會)는 중화요리업 조합으로, 회장은 주복기(周禮基)였다. 1949년 당시 인천에는 중화요리점과 소형 음식점을 포함하여 모두 69개소가 영업하고 있었다. 주요한 중화요리점은 송죽루(松竹樓, 경영자 周禮基), 공화춘(共和春, 于希光), 중화루(中華樓, 徐德有), 만취동(李慶文), 빈해루(濱海樓, 干煥興), 복생루(福生樓, 揚福州), 금매원(錦梅園, 林汝夏), 평하원(平下園, 周銘昌)이 있었다. 중일전쟁 시기 영업하던 송죽루, 공화춘, 중화루는 그대로 영업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화요리점과 음식점의 영업은 對중화권 무역으로 인천항의 경기가 좋아 수입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4)


인천 화상 무역회사 만취동의 주권(株券)

출처: 서은미 씨 제공 사진.


상기의 ‘화상의 조직과 연혁 개황’에는 나오지 않지만, ‘인천화상무역조합’이라는 무역조합이 있었다. 조합장은 이전의 인천화상상회 주석인 손경삼이 맡고 있었는데, 중일전쟁 시기의 화상무역협의회와 같은 조직이었던 것 같다.




1) ‘화상의 조직과 연혁 개황’, <인천중화상회 보고의 화상 개황 의견서>, 『인천중화상회 보고서』(인천화교협회소장).


2) 조선은행조사부, 『1949년판 경제연감』, 1949년, Ⅱ-68∼69쪽.


3) 조선은행조사부, 앞의 자료 (1949), Ⅱ-68·71쪽.


4) 조선은행조사부, 앞의 자료 (1949), Ⅱ-68·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