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화요리, 그 ‘식(食)’과 ‘설(說)’ (7)

공화춘(共和春)의 후손을 만나다 -우신후(于信厚)씨와의 인터뷰-

주희풍 _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진유광(『중국인 디아스포라―한국화교이야기』(이하 번역본), 2009:140)에 따르면 공화춘(共和春)은 전설적인 중화요리점이다. 공화춘의 전신은 1905년에 개설된 산동회관(山東會館)이다. 진유광의 글(번역본, 2009:144)에서는 “오늘날 공화춘은 화교사회의 모범적인 가정이기도 하다”라고 기술하면서 공화춘의 2대 사장이자 인천화교협회 회장과 인천화교중산중학(仁川華僑中山中學) 이사장을 역임한 우홍장(于鴻章, 1914년~1993년) 그리고 슬하의 3남1)을 두었다고 하면서 이례적으로 일일이 소개를 한다. 그만큼 공화춘 가문이 한국 화교사회에서 매우 비중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우신후(于信厚, 42), 우홍장의 3남 우심강(于心强, 73)2)의 장남으로 산동회관(山東會館)과 공화춘(共和春)의 창시자 우희광(于希光, 1886년~1949년)의 4대손이다. 우심강은 인천화교중산중학의 국어 선생님이자 교무주임이었다. 우신후는 교육자 집에서 태어난 셈이다. 우신후는 인천화교중산중학을 나와 대만(臺灣) 大專聯考(대만의 대입시험)3)을 통해 명문대인 정치대학(政治大學)에 입학했다.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와 모교에서의 선생님 임용을 거절한 뒤 인천 송현동에서 슬하 2남을 두고 아내와 살고 있다. 한국 화교사회에서 매우 보기 드문 재한화교 4.5세의 존재이다. 가히 “화교사회의 모범적인 가정”이다. 우신후는 필자와 동기동창생으로 초·중·고 학창시절을 줄곧 같은 반에서 지냈다.


인터뷰 동기는 매우 단순했다. 얼마 전 종합편성채널의 한 프로그램에서 “공화춘의 후예”가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친구가 나오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시청했는데 예상과 크게 달랐다. 필자는 인터뷰 장소로 지금의 짜장면박물관인 공화춘으로 정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예상치도 못했다. 그는 그 장소를 매우 불편해하고 꺼렸다. 그러면서 “꼭 거기서 인터뷰해야 돼?”라고 회답이 왔다. 필자는 의아해하는 마음으로 장소를 바꾸어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는 2015년 7월 18일 오후 2:00 인천 신포동의 어느 커피숍에서 이루어졌다.


tvN 수요미시회 11회 영상 캡처


위 프로그램에서 소개한 것은 뜻밖의 인물인 우희광의 외손녀 왕애주(王愛珠, 44)이다. 이것에 대해 우신후는 매우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가짜 공화춘(假的共和春) 알지?”


우희광의 외손녀가 운영하는 중화요리점 소위 말하는 가짜 공화춘(假的共和春)


인천차이나타운에는 또 하나의 공화춘이 있다. 화교사회에서는 가짜 공화춘(假的共和春)이라고 불린다. 가짜 공화춘의 회사명은 “(주)공화춘 프랜차이즈”이다. 이 회사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주)공화춘 프랜차이즈 연혁표4)

년도

내용

1998

공화춘 재건 프로젝트 수립

2000

공화춘 브랜드 개발

2001

공화춘 브랜드 상표출원 (제41-2002-0008072)

2002

공화춘 브랜드 상표등록 (제41-0091538)

2003

공화춘 브랜드 2차개발 수립

2003

인천 차이나타운 內 공화춘 본점 착공

2004

공화춘 차이나타운 본점 오픈

2004

공화춘 경기도 이천점 오픈

2004

공화춘 수원점 오픈

2004

공화춘 인천시 문화재로 지정

2004

공화춘 박물관 건립 발표(인천시)

2005

자장면의 100년 해로 공식선포

2005

각종 매스컴에 공화춘 자장면의 원조로 공식보도

(MBC 9시뉴스 / KBS 9시뉴스 / SBS 8시뉴스 YTN 뉴스 등)

2006

공화춘 체인사업부 공식 출범

 프랜차이즈 체인사업개시


위 연혁표에서 알 수 있듯이 가짜 공화춘은 2004년과 2005년 있었던 “문화재 지정”과 “공화춘 박물관 건립 발표” 그리고 “각종 매스컴에 공화춘 자장면의 원조로 공식보도”와 같은 내용을 공화춘(共和春)과 구분 없이 기재한다. 한국 화교사회에서 가짜 공화춘으로 불리는 이유가 충분하다. 다시 연혁표를 보면, 1998년 “공화춘 재건 프로젝트”는 결국 “공화춘 브랜드 개발”과 “공화춘 브랜드 상표출원” 그리고 “공화춘 브랜드 상표등록”이 아닌가? 낡은 성격의 자본주의, 즉 천민자본주의(pariah capitalism)의 전형이다. 우희광을 비롯한 3대 선친이 피땀 흘려 이룬5) 전설적인 중화요리점의 명성을 그대로 가져간 셈이다.


“가짜 공화춘(假的共和春)하고 소송한 거 알지?”


tvN 수요미시회 11회 공화춘 상표등록에 대한

영상 캡처


많은 사람들이 이 소송이 상표권 등록 때문에 일어났다고 알고 있다. 사실 그렇지 않다. 초창기 가짜 공화춘은 “공화춘(共和春)의 후예”라는 이름을 내걸고 중화요리점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하(賀)모씨를 주방장으로 영입하고 공화춘의 후예라고 내세운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하모씨는 공화춘 가문의 후예가 아니다. 20세기 80년대 공화춘이 영업을 중단할 때까지 하모씨는 공화춘 주방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2000년대 초 우신후를 비롯한 공화춘 후손들이 중단했던 영업을 제기할 계획을 세웠다. 이 때 하모씨를 주방장으로 영입했다. 하모씨는 공화춘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왔기 때문에 공화춘의 후손이 “삼촌”이라고 부를 정도로 각별했다. 주방장으로 영입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모씨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변절했다고 한다. 어느새 가짜 공화춘의 주방장이 되어 있었다. 우신후는 분명히 말했다. “그 소송은 ‘상표권 등록’이 아닌 ‘후예’의 명예 때문에 결정한 소송이라고.”


“인천중구청이 더 짜증나!”


소송판결문의 요지는 당시 공화춘이 영업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짜 공화춘의 상표권등록이 정당하지만 공화춘 후손이 아니기 때문에 “공화춘의 후예”라는 문구는 사용할 수 없다는 판결이다. 공화춘은 2004년 가치 있는 건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건물 외관에 손을 댈 수 없었다고 한다. 2006년에는 인천광역시 근대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영업 재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왜냐하면 아래 사진과 같이 폐허에 가까운 외관으로 영업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소송은 2008년에 있었다.  


근대문화재로 지정되었을 당시 공화춘의 모습


이 이율배반적인 상황에서 우신후의 가족은 공화춘 한 켠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이 당시 우신후의 가족이 살던 곳이다.


당시 우신후 가족이 살았던 곳


이 때 공화춘의 소유는 우심강과 연고를 알 수 없는 손(孫)모씨였다. 사실 산동회관과 공화춘은 우희광의 개인 소유가 아니다. 여러 명의 합자(合資)로 이루어졌는데 한국전쟁이 끝난 후 우신후의 조부 우홍장이 여러 명의 지분을 모두 매입해서 공화춘을 개인의 소유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연락이 닿지 않는 합자인(合資人) 한 명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손모씨다. 우신후는 지금도 이 손모씨의 후손을 계속해서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얼마 후 인천 중구청에서는 공화춘의 매각을 권유해왔다고 한다. 구청에서는 공화춘을 짜장면박물관으로 운영하고자 했는데, 제시한 조건이 공화춘의 일부분에서 중화요리점으로 영업을 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매각이 이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건이 바뀐다. 공화춘이 근대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영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짜장면박물관 한 코너에서 입장객을 위해 시식 및 짜장면 조리 시연과 동시에 짜장면 판매를 할 수 있도록 조건을 수정했다. 또 얼마가 지났을까? 구청에서는 입장객을 위한 짜장면의 조리 시연과 판매는 괜찮은데 공화춘이 근대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불의 사용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고 통보한다. 그러면서 시식코너는 임대이며 짜장면 조리 시연의 비용 또한 우신후 측에서 부담하는 걸로 조건이 수정된다. 이 때 우희광의 외손녀인 왕애주가 운영하는 중화요리점에서 짜장면을 만들어 공화춘으로 배달하는 형식이 논의되었다. 왕애주가 운영하는 중화요리점은 공화춘과 매우 가까워 가능했지만 뻔히 보이는 적자 앞에서 구청과 동업을 포기하기로 한다. 우신후는 구청에서 포기를 유도했다고 한다. 격분하면서 “사기 당한 느낌이야! 매번 조건을 제시하는 공무원도 다르고 서로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전에 공무원은 전출 되었다고 하는 식이야!”라고 했다. 울분을 토하고 인천 차이나타운을 떠난 이유라고 했다. 이에 음식점을 운영하는 “공화춘(共和春)의 후예”로는 왕애주가 되는 것이다. 비록 외가 쪽이라도 말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필자의 머릿속에서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마지막 황제 (The Last Emperor, 1987)』의 마지막 장면인데 중국의 마지막 황제 부이는 결국 입장권을 사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자금성에 들어간다. 공화춘의 4대손인 우신후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공화춘을 불편해하고 꺼려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참고문헌 


진유광 저/ 이용재 역 『중국인 디아스포라―한국화교 이야기』, 한국학술정보(주)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tvN http://ch.interest.me/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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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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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홍장은 슬하에 4남을 두었다. 진유광의 글(번역본, 2009)에서는 3남까지만 언급되어 있다. 4남은 우심립(于心立)이다.


2) 진유광의 글(번역본, 2009)에서는 큰아들 우심강(于心强)과 셋째 아들 우심진(于心辰)의 이름이 바뀌어 기술되어 있다. 큰아들이 우심진(于心辰) 셋째 아들이 우심강(于心强)이다.


3) 한국의 화교학교에서는 매년 大專聯考(대만의 대입시험)을 실시한다. 응시생들의 성적과 대입 지원서에 따라 합격 여부가 결정된다. 


4) 출처: (주)공화춘 프랜차이즈 홈페이지 http://www.gonghwachun.co.kr/

   공화춘이 인천광역시 근대문화재로 지정된 시기는 2006년 4월 14일이다. 2004년에는 인천광역시의 가치 있는 건물로 지정되었다.


5) 진유광(번역본, 2009:139-144) 참고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