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화교협회 소장 자료 발굴을 통해 본 ‘인천화교 사화(史話)’ (15)

이정희 _ 인천대학교 HK 교수


근대 인천화교의 단체 가운데는 인천중화농회라는 조직이 있었다. 인천화교협회소장자료 가운데 ‘인천화상상회 화교 상황 보고 중화민국24년(1935년) 3월’은 인천중화농회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번역문|

민국원년(1912년) 화교 야채상 및 야채재배 농민의 발기로 조직되었다. 처음의 명칭은 중화농업회의소였다. 민국22년(1933년)에 지금의 중화농회로 명칭이 바뀜. 현재 농회의 모든 비용은 야채상 및 야채재배 농민에 의한 매월 회비 납부에 의해 충당 됨.1)


이 사료로 볼 때 인천중화농회는 1912년에 설립되었다. 왜 인천에 중화상회뿐 아니라 중화농회가 설립되었는지 그 경위를 추적해 보자.


인천에서 화교에 의한 야채재배가 시작된 것은 1887년경이었다. 산동성 출신의 왕(王)씨와 강(姜)씨 성을 가진 2명의 화교가 인천항 개항에 따라 야채 수요가 증가한 것에 착안하여 산동성에서 가져온 야채 씨앗으로 야채를 재배한 것이 효시다.1) 두 명의 화교가 야채재배를 시작한 전해인 1886년, 인천 청국조계, 일본조계, 각국조계에 거주하는 외국인 인구는 911명에 달했다.2) 인천의 각 조계에 거주하는 외국인 인구는 그 후 점차 증가하여 1893년에는 3,215명으로 늘어나 야채수요는 더욱 증가했다. 이에 따라 화교농민(화농)의 호수는 1892년에 5호(22명)으로 증가하고,3) 청일전쟁 직전에는 15호로 증가했다.4)


당시 화농은 오이, 옥수수, 파, 가지 등을 근면하게 재배하여 일본인 거류민의 각 가정을 방문하며 염가에 판매했다. 일본인 농가도 야채재배를 했지만 그 품질이나 가격 면에서 화농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5) 또한 조선인 농민은 주로 배추, 미나리 재배에 집중하여 일본인과 서양인이 즐겨먹는 야채를 재배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화농이 인천지역 상업적 야채재배에서 절대적인 강자가 된다. 1906년 인천지역 화농의 호수는 156호, 540명으로 급증, 상업 호수 91호를 훨씬 능가했다.6) 인천화교 가운데 화농의 비중은 개항기 때 이미 화상을 능가하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화농 인구 증가와 야채 판매 증가로 생산과 판매를 관리하는 조합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1912년에 설립된 것이 인천중화농회였다. 상기의 사료는 인천중화농회의 전신을 ‘중화농업회의소(中華農業會議所)’라고 했지만 이것은 잘못이다. 정확히는 ‘중화농업공의회(中華農業公議會)’였다. 그 근거가 인천화교협회 소장자료에 나타나 있다.


인천부의 화농 곡수용(曲秀蓉)부부가 1914년 12월 야간에 누군가로부터 습격을 당해 큰 상처를 입었다. 곡수용 부부는 고향인 산동성으로 귀국하려 하지만 비용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인천농업공의회가 인천화교사회에 호소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모금 총액은 총 286.905元이었으며 귀국비용 등을 제외한 잉여 금액은 166.355元이었다.7)


중화농업공의회는 1912년 설립되자마자 인천부 신정(新町, 현재의 신포동)의 화교 진덕흥(陳德興) 소유의 건물에서 야채를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신포동의 화교 야채시장의 시작이 된다.8)


중화농업공의회는 1912년 130호의 화농 농가의 회원으로 시작했으며, 1929년에는 200호로 증가했다. 공의회의 직원은 동사 1명, 반터우(班頭, 평의원) 9명, 각 지역별로 파이터우(牌頭, 조장)을 두고 각 회원 및 야채시장을 관리했다. 회원의 회비는 1912년 0.6엔, 1913년 0.8엔, 1914년부터 1.0엔, 1926년부터 1.2엔, 1929년 1월부터 10월까지는 1.0엔이었다.9)


|그림| 인천농업공의회의 문서(1915.2.16)10)


중화농업공의회의 1개월 경비는 1924년 현재 신정과 내리(內里) 야채시장의 건물 사용료 75엔, 청소부 인건비 10엔, 수도요금 7엔, 전기료 7.5엔, 통신 및 신문 구독료 0.9엔, 기타 2엔, 총 102.45엔이었다.11) 


‘인천중화농업회’의 1930년 회원 228명의 거주지 별 분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체 회원의 77%에 해당하는 176명은 다주면(多朱面)에 거주했다. 이들의 거주지를 리(里)단위로 보면, 용정리 60명(전체의 26.3%), 장의리 38명(16.7%), 도화리 33명(14.5%), 사충리 23명(10.1%), 학익리 9명(3.9%), 신화수리 8명(3.5%), 금곡리 5명(2.2%)의 순이었다.12) 다주면 가운데서도 용정리, 장의리, 도화리, 사충리에 화농 야채밭이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 회원 228명의 출신지를 보면, 전원이 산동성 출신이었다. 이들의 출신지를 현(縣)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롱청현(榮成縣) 63명(전체의 27.6%), 무핑현(牟平縣) 60명(26.3%), 저청현(諸成縣) 38명(16.7%), 원덩현(文登縣) 27명(11.8%), 라이양현(萊陽縣) 9명(3.9%), 러자오현(日照縣) 8명(3.5%), 기타 각 현이 20명이었다.13) 이것으로 볼 때 인천의 화농은 인천에서 가까운 산동성 동해안 지역의 롱청, 뭐핑, 저청, 원덩 출신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인천부는 1924년 12월 신정의 야채시장을 공설시장화 하려고 중화농업공의회와 교섭에 들어가 야채시장은 1925년에 인천부의 소유가 된다. 그 후 인천부는 1926년에 야채시장을 야채와 어산물의 공설일용품시장으로 할 방침을 정했다. 인천농업공의회는 화농의 기존 권익을 박탈하는 것이라고 맹렬히 반발, 인천영사관의 알선으로 야채시장의 행정권은 인천부에 이양하는 대신 야채판매는 인천농업공의회가 계속 독점하는 것으로 결정됐다.14) 그래서 1927년 3월부터 신정의 야채시장은 완전히 공설시장이 된다.


인천부는 제2차 배화사건 직후 다수의 화농이 귀국한 틈을 타서 신정 공설시장을 화농이 독점하고 있는 것에 대한 조선인 및 일본인의 반발 여론을 등에 업고 공설시장의 판매대를 30개소로 늘리는 대신 조선인과 일본인에게 15개 판매대, 화교에게 15개 판매대를 허가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전에 화농은 20개 판매대 전부를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5개 판매대가 줄어들었으며, 조선인 및 일본인과 공동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15)


그런데 중화농업공의회는 1929년 11월 업무를 갑자기 중지했다. 그 이유는 동 공의회의 전 회장이 1912년부터 18년간 장기집권 하였고 그의 회비 지출을 의심한 회원들이 반대파를 조직, 공의회의 장부를 조사하는 등 공세를 폈기 때문이다. 전 회장의 반대파는 ‘인천중화농업회’를 조직하고 이전 농업공의회가 가지고 있던 잔금 369.18엔과 전화기 등을 자신의 소유권으로 해달라고 요구, 전 회장파는 이에 반발, 새롭게 ‘중화농산조합(中華農産組合)’을 조직했다. 이 두 단체는 잔금과 전화기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대립했다.16) 주인천판사처는 두 단체 모두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는데 상기의 사료에 의하면 민국22년(1933년)에 지금의 중화농회로 명칭이 바뀐 것으로 봐서 1933년에 양자 간의 화해가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1) 朝鮮總督府 (1924), 『朝鮮に於ける支那人』, 109쪽.


2) 仁川日本人商業會議所 (1908), 『明治四十年仁川日本人商業會議所報告』, 71-72쪽. 인구의 내역은 화교 205명, 일본인 706명이었다. 서양인의 상세한 인구는 미상.


3) 仁川府廳 編纂, 위의 자료 (1933), 1526쪽.


4) 朝鮮總督府, 위의 자료 (1924), 109쪽.


5) 김경태 편 (1987), 『통상휘찬 한국편①』(복각판), 여강출판사, 644-645쪽.


6) 1906年4月(음력), 仁川中華會館呈, <仁川本業港興商號戶口人數>, 「華商人數淸冊…各口華商淸冊」,『駐韓使館?案』(동02-35, 041-03).


7) 1905年2月16日, 仁川農業公議會總理人王成?, 『曲秀蓉夫婦救濟案』(인천화교협회소장).


8) 1930年7月3日發, 駐淸津領事館張義信이 駐朝鮮總領事에게 보내는 공문, 「仁川農會紛糾案」,  『駐韓使館?案』 (同03-47, 192-03).


9) 1931年10月2日收, 仁川中華農會執行委員會가 駐朝鮮總領事에게 보내는 공문, 「仁川農會改組及賑捐」, 『駐韓使館?案』 (同03-47, 205-01).


10) 1915年2月16日, 仁川農業公議會, 『曲秀蓉夫婦救濟案』(인천화교협회소장자료).


11) 朝鮮總督府, 앞의 자료 (1924), 110쪽.


12) 1930年, 中華勞工協會仁川支部呈, 「中華農會會員冊」, 『駐韓使館?案』 (同03-47, 191-02).


13) 1930年, 中華勞工協會仁川支部呈, 「中華農會會員冊」, 『駐韓使館?案』 (同03-47, 191-02).


14) 1932年4月5日收, 駐仁川辦事處暫代主任張義信이 駐朝鮮總領事에게 보내는 공문, 「仁川公設市場之菜類販賣權」, 『駐韓使館?案』 (同03-47, 218-02).


15) 1932年4月5日收, 駐仁川辦事處暫代主任張義信이 駐朝鮮總領事에게 보내는 공문, 「仁川公設市場之菜類販賣權」, 『駐韓使館?案』 (同03-47, 218-02).


16) 이 대립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李正熙 (2012), 『朝鮮華僑と近代東アジア』, 京都大學學術出版會, 322-328쪽을 참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