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동북이야기 (6)    동북이민과 동향회: 이민도시 봉천의 형성과 한족상인

동북이민과 동향회: 이민도시 봉천의 형성과 한족상인1)

김희신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청대 초기 동북이민은 대부분 화북지역에서의 한족농업이민이었고, 동향·동족의 집단적 이주를 통해 농업개간을 하며 동북 각지에 정착하였다. 이주자의 증가는 생활필수품 공급을 담당할 한족 상인의 동북 유입을 촉진했다. 봉천지역에도 마찬가지로 농업의 발달과정에서 順治시기로부터 康熙, 雍正 연간에 이르기까지 流民과 함께 상인, 수공업 장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족 상인들은 지형을 관찰하고 원근을 측정하여 각 지점을 통괄해야 할 지역을 점쳐서, 이주자들의 수요를 만족시킬 상점을 세웠다. 상점의 개설은 얼마 후 도시발달의 첫걸음이 되었다.


청말에는 奉天, 盖平, 錦州가 봉천성의 상업중심으로 간주되었고 한족 상인들은 그곳에 상점을 집중적으로 개설했다. 이들 상점은 대부분 關內에 상당한 자본과 공고한 기초를 가진 상점의 분·지점이었다. 초기에는 종종 잡화상의 형태로 출현하였다가 후에 규모가 점차 확대되어 동북 각지의 각종 수요에 따라 면포, 목면, 약품 등을 주로 취급했다. 잡화포 외에도 점차 수공업 방식의 양조, 대두가공, 제분, 곡물거래, 전통금융업 등에 종사하는 상인집단이 각 도시 내에 출현했다. 이민 인구 증가와 함께 동북의 도시 내에는 중국인 거리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청대 동북의 한족 상인은 산서상인과 직예상인이 중심이 되며, 동북 개발의 진전과 함께 그 활동도 활성화되었다고 평가한다. 1931년 『東北年鑑』에서는 “동북에 와서 상업을 경영한 자는 대부분이 내지 각 省의 客籍 상인, 특히 직예, 산동, 산서 3성 출신이 대부분”이라 했다.


산동 상인들은 주로 산동반도의 상업경제권에 속하는 黃縣, 蓬萊縣, 招遠縣, 掖縣 등지에서 봉천으로 이주해 왔다. 동북지역에서 산동인의 상업 활동은 초기에 絲房, 當? 경영을 중심으로 했다. 그 외에도 錢莊, 粮行, 藥房, 紡績, 석탄 등 그 경영범위는 비교적 광범위했다. 그 중에서도 산동인이 다수 종사했던 업종은 사방이었다. 산동인의 사방업은 청조 순치시기 산동상인이 자수용 견사를 봉천으로 팔러왔고, 이후 상인들은 工房을 만들어 자수용 견사를 봉천에서 생산했던 것에서 시작된다. 사방이 규모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견사의 생산판매 외에도 경영범위를 넓혀 잡화판매업으로 전환해 갔다. 이후 일반적으로 사방업 종사자는 각종 잡화의 수입과 판매를 행했던 유력 잡화상(백화상점)으로 통칭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동북에서 대두, 고량 등 농산품을 구매하거나 농산품을 가공하여 관내로 운송했다. 이러한 교환을 통해 산동의 잡화상들은 점차 자본을 축적하였고, 이 기초위에 동북 각지에 상업망을 구축해 갔다. 그리고 이 상업망을 기초로 각지에서 상당히 영향력 있는 商幇이 되었다. 봉천에는 산동 황현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다. 황현은 인구가 많은데 비해 토지가 협소한데다 지리적으로도 동북지역과 비교적 가까워 수륙 교통의 편리성을 갖추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상업경제권에 속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동북으로 드나들며 상업에 종사하는(당시 ‘闖關東’이라 함)” 관습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청대 광서 년간 황현 城內에만도 300여개의 환전상과 잡화점이 있었다고 한다. 산동 황현 성내 4대 부호였던 單興順, 林姓 ?德堂, 鄭安素堂, 趙積安堂 등이 아주 이른 시기 사방업의 天合利, 吉順昌, 謙祥泰, 趙興隆 등을 봉천에 개설했다. 이후에도 계속 동북각지에 점포를 세웠고, 점차 동북 내에서 세력을 증대해 갔다. 1930년대 초반까지 鄭安素堂 가족이 동북의 상공업에 대한 투자액이 200여만 원 이상이며, 점포수는 100여 곳에 달했다고 한다. 다만 1920년대 후반 동북지역정권의 수입대체공업 육성정책과 일본상품 보이콧운동은 국내외의 상품수입으로부터 이익을 축적해 왔던 사방(백화상점)과 산동자본의 쇠퇴에 영향을 미쳤다.


산서상인은 주로 太原縣, 初縣, 太古縣, 太谷縣, 徐溝縣 등에서 이주해 왔고 전당포, 양조 등의 업종에서 그 특성을 발휘하였다. 일찍이 명대에 산서인들이 원거리간 상업거래에서 現銀 휴대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票號(票莊)를 개설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표호는 환업무를 주로 했던 구식상업금융기관이며, 산서인의 과점 업종으로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조직이었다. 명·청대 동북의 주요 도시들은 주로 軍주둔지였고, 주둔지로의 양식 및 군비의 공급은 동북으로의 주된 물류 중 하나였다. 이로부터 환업무도 생겨나게 되고 동북내 군주둔지를 중심으로 산서상인이 거점을 갖기 시작했다. 봉천지역의 초기 표호 영업의 성쇠와 관련된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錢?’ 항목으로 분류된 상점가운데 隆豊東(道光년간 개업), 富森竣(1827년 개업), 萬億恒(1853년 개업), 義泰長(1858년 개업), 淵泉溥(1871년 개업) 등이 영업 초기 표호 업무를 주로 했던 상점이었다. 이들 전포는 비교적 이른 시기 모두 산서인이 출자하여 개설된 것으로, 그 업무 범위는 간단한 태환 업무에서부터 예금, 대출 업무를 겸했다. 그 가운데 일부 전포는 개설초기 봉천성정부와의 관계를 이용하여 영업발전을 도모하였다. 근대은행이 아직 개설되지 않았던 청대에 연천부는 구식지폐(私帖) 발행, 省庫 재정 관리의 특권을 향유했고 봉천에서 매우 주요한 금융기관으로 성장해갔다. 부삼준도 성고 재정관리 등의 특권을 향유하여 구식 금융업계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그런데 청말 봉천장군 趙爾巽이 1905년 동북지역의 폐제통일을 목적으로 東三省官銀號를 설립하였고, 이는 산서 표호에게는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동삼성관은호가 성립된 후 연천부와 부삼준 등이 누렸던 기왕의 특권은 모두 취소되었고 영업범위도 예금, 대출, 환 관리 등으로 축소 변경되었다. 한편 청말 ‘은행’이나 ‘저축회’라 불리던 새로운 근대 금융기관의 등장도 표호와 같은 전통적인 금융기관의 쇠퇴에 영향을 미쳤다. 기존 전포에 예치되었던 자금 대부분이 동삼성관은호나 새로운 금융기관으로 흘러들어갔다. 산서인의 과점 업종이었던 표호 기능의 쇠퇴는 봉천지역에서 구식 금융기관과 산서자본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편 하북(직예) 상인은 하북의 동쪽, 즉 昌黎縣, 臨楡縣, 撫寧縣, 樂亭縣, 深縣 등에서 유입된 인구수가 가장 많아 ‘冀東幇’이라 불렀다. 冀東 지역도 동북지역과 거리가 가장 가깝고 역사상 농민의 ‘틈관동’ 전통이 있다. 농민뿐만 아니라 하북 이민자 중에는 학식이 있는 사람이 비교적 많았다. 장사 수완도 좋아서 동북에 들어온 후 주로 상업 활동에 종사하여 양잔, 약방, 잡화포, 유방, 당포 등을 운영했다. 청대 사방과 전포가 산동과 산서상인들의 과점 업종이었던 것에 대해 하북 상인이 비교적 이른 시기 봉천에 개설한 天泰號(강희년간 개업), 廣生堂(1739년 개업), 恒發成(1853년 개업)은 봉천 양곡상, 약방, 잡화상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점포로 1930년대까지 누대로 영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렇듯 산동, 하북 지역은 지리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동북지역과 가깝고, 역사적으로도 동북에서의 상업경영은 ‘틈관동’을 통해 경제적 성공의 기회를 찾는 하나의 습속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한편 산서상인의 경우는 표호처럼 투자한 업종의 경쟁력의 측면에서 전통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우세한 측면이 있었다. 하북, 산동, 산서 출신이 청대 동북에서 경제적 기반을 선점함으로써 그들보다 뒤에 진출해 온 다른 지역 출신 이민자들에 비해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중국의 경우 전통적으로 타지에서의 정착과정을 설명하는데 개인적인 네트워크, 특히 혈연, 지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가지의 팽창과 함께 동향인이 증가하게 되고, 동향단체인 準혈족단체의 결성을 가져오게 된다. 봉천 소재의 동향회관들은 한족이 동북으로 대거 이주한 후 건설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중국 관내와는 달리 오랜 역사를 가지지 않는다. 봉천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이민 인구는 더욱 증가하였고, 이민자들 사이의 경쟁과 갈등은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각 지역의 동향인들은 동향인을 대표하는 회관을 세워 각 幇의 이익을 보호하였다. 그 역사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만철조사에 의하면 봉천에는 1722년 奉天直隸會館 설립을 시초로 하고, 뒤이어 1792년 산동회관 등이 조직되었다고 한다. 이후 회관의 수도 점차 증가해 갔고, <海關十年報告(1882-1891년)>에서는 1882-1891년간 봉천省에 다른 지역 상인이 세운 회관이 10개가 있고, 봉천(당시 盛京)에는 직예, 三江, 산동, 산서회관 등이 존재한다고 보고되었다.


『(第1回)滿洲華商名錄』(1932)을 기초로 분석한 바에 의하면 1932년초 도시 봉천내에 商界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省 단위의 동향회는 산서동향회, 절강동향회, 산동동향회, 직예동향회 등 4개가 존재했다. 그 외에 縣 단위의 동향조직, 즉 하북의 深縣同鄕會·撫寧縣同鄕會·臨楡縣同鄕會·昌黎縣同鄕會, 절강의 紹興同鄕會, 산동의 招遠縣同鄕會·黃縣同鄕會 등 모두 7개의 동향단체가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봉천에 하북, 산동 관적을 가진 인구수가 많아지면서 주요 府·縣마다 동향단체를 구성하는 지역별 분화 현상이 나타났던 것으로 짐작된다. 적어도 이들 현 단위 동향단체의 존재를 통해 봉천상인의 주요 내원과 규모를 省·府·縣 단위로까지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봉천에 절강 관적을 가진 상업종사자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소흥동향회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名錄』에 의하면 和發永 사방의 자본주 徐文이 봉천에서 30년 넘게 머물며 상업으로 치부하였고, 당시 봉천 소흥동향회의 회장이었다. 원래 봉천에 절강인, 특히 소흥인 관리가 많았고, 이들 관리가 회관의 중심이 되어 소수 상인과 연계하여 회관을 조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소흥인 대부분이 회적하였고 그 숫자가 급감하여 소흥동향회는 1932년초 조사당시 회장 이하 3명으로 겨우 유지되는 정도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외에 安徽, ?江, 江西, 湖廣會館 등이 존재했는데 주로 군인, 관리, 상인 등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만주사변 이전 호광회관은 군인정치가 등이 입회하였지만, 사변이후 군인정치가들이 귀국하고 호북성 이발업자 100여명에 의해 조직이 유지되었다. 그 실질은 호광회관이 아닌 湖北會館이며 동업단체였다. 민강, 강서회관의 회원도 대부분 군인관리였는데 사변 후 대부분 귀국하면서 유명무실해졌다.


원래 동향회는 동향인이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동향인이 무조건 가입자격을 갖고 있어야 하지만 봉천의 직예회관, 산서회관, 산동동향회 등은 거의 동향 상인계층에 의해 조직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일반적으로 동향단체의 활동내용은 회관에 따라 차이가 있어도 대체로 동향인의 친목, 자선구제 사업을 중심으로 한다. 다만 동향단체가 상호 부조의 목적을 관철하고, 단결력을 공고하게 하는데 종교의 힘을 필요로 하기도 했다. 회관사업 중 종교기관으로서의 활동이 중요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회관내부에는 거의 대부분 제단을 설치하여 각종 신을 모셨고, 종교적 부속기관으로서 관을 안치해 두는 공간이나 일종의 공동묘지를 소유하기도 했다.


동북내 동향회 조직의 역사가 짧기는 하지만,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동향네트워크의 거점들이 존재했다. 동북 경제의 발달과정에서 유입된 이민인구가 지역별로 각 幇을 형성하고, 회관을 세우는 전통적인 중국 상인사회의 특징이 봉천에도 예외가 없이 드러나고 있다. 동향회는 이민도시로 성장해갔던 봉천의 상인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주요한 조직 중 하나였다. 이와 관련해서 기존의 연구에서는 동북의 동향회가 친목, 자선 등에서 의미가 있을 뿐 상업적 측면에서는 가치가 적다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주요한 동향단체가 전적으로 상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동향 상인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특히 황현동향회가 濟東銀號의 설립을 추진했던 것을 구체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1926년 황현동향회가 여유자금 10만원과 봉천소재 황현방 상점으로부터 10만원을 모집해서 자본금 20만원으로 전포를 개설했다. 1926년은 당시 봉천표 폭락으로 錢業에 대한 봉천당국의 단속 때문에 금융이 경색되는 등 시장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제동은호는 개설과 함께 황현방에 속하는 사방, 잡화업, 면사포업 종사자들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았고, 해당 동향회를 중심으로 협력을 유지하며 자금을 원조했기 때문에 전포의 자금회전은 매우 원활했다. 황현방 외에 봉천내 다른 객방과의 거래도 활발했고, 1931년 연대출 총액은 120만원으로 업계 1위였다. 황현동향회가 출자하여 개설한 제동은호의 사례는 동북지역 특히 봉천의 동향회가 단순히 친목단체로만 존재했다고 평가할 수 없으며, 한족상인의 상업 활동에 여전히 적극적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단서를 제공한다.



1) 이 글은 『중국근현대사연구』 제62집(2014.06)에 게재된 필자의 논문 ?중국동북지역의 상업자본과 상점네트워크?의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