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화교협회 소장 자료 발굴을 통해 본 ‘인천화교 사화(史話)’ (12)

이정희 _ 인천대학교 HK 교수


근대시기 조선화교는 자신들의 조선 이주의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인천화상상회가 1935년에 작성한 <華商商況報告> 문건 가운데 <화교의 조선 이주 연혁>은 그에 대한 일정의 답을 주는 사료이다. 먼저, <화교의 조선 이주 연혁>의 원문과 번역문을 아래에 게재한다.



[원문]                            華僑來鮮沿革

 

    考我民之初來朝鮮遠在啓太師箕子率兵避居之時, 至漸有貿易上之關係者固起自淸代也, 其前不過自然之移殖, 而已在淸代我僑大抵以朝鮮各大都市如京城仁川平壤元山新義州淸津釜山大邱群山木浦等處爲貿易之中心地, 惟人數尙不甚衆, 其往鄕間貿易者以行商爲多數, 其設立門市營業者爲數甚少, 至淸末民初以來我僑在鮮商勢日盛, 各市鎭間設立門市者逐漸繁盛, 幾有?布全鮮之勢, 自民國七八年至十四五年之間情勢最盛, 僑民總計約在九萬餘人, 自暴動以後人數頓漸依現在情況統計不過四萬餘人, 而已至於僑民之籍別大部槪係魯籍, 其他各地均爲數無多.

 


[번역문]                    화교의 조선 이주 연혁

 

  우리 상민이 처음으로 조선에 온 것은 멀리로는 태사(太師) 기자(箕子)가 병사를 이끌고 피난하여 이주한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점차 무역 관계자가 청대부터 이주했으며, 그 전에는 자연적인 이식에 불과했다. 청대에 우리 화교는 대개 조선의 대도시인 경성, 인천, 평양, 원산, 신의주, 의주, 청진, 부산, 대구, 군산, 목포 등지의 무역중심지에 거주했다. 그러나 인구는 아직 많지 않았으며 고향과의 무역을 하는 자는 행상이 다수였다. 점포를 설립하여 영업하는 자는 극소수였다. 청말민초(淸末民初) 이래 우리 화교는 조선에서의 상세(商勢)가 날로 융성하여 각 도시와 농촌에 점포를 설립하는 자가 날로 번성하여 조선 전국에 점포가 산재하는 세력을 형성했다. 민국7·8년(1918년·19년)부터 민국 14·15년(1925년·26년)까지의 상세(商勢)가 가장 번성하여 교민의 총수는 약 9만 명에 달했다. 폭동 이후부터 인구는 점차 감소하여 현재는 약 4만 명에 불과하다. 교민의 원적(原籍)별 분포는 대부분 산동성 출신이고, 기타 지역은 모두 합해도 많지 않다.


먼저 이 사료에서 눈에 띄는 것은 ‘화교’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화교’라는 용어는 1870, 80년대에 청국이 조약에 근거한 외교관계에 돌입했을 때 재외 거류민의 상민을 정의할 필요가 생겼는데, 이때 사용한 말이 ‘교거화민’(僑居華民)이었다. 이 ‘교거화민’에서 어순을 뒤바꾸고 간략화 하여 신조어로 만들어진 것이 ‘화교’라는 용어이다.1)


‘중화민국주조선총영사관’이 1930년 3월 펴낸 『조선화교개황』(朝鮮華僑槪況)도 그 제목에 ‘화교’라는 용어를 사용했다.2) 조선에서 영업하는 화교 상인은 ‘교상’(僑商)이라 불렀다. 그런데 조선총독부는 ‘조선화교’라는 용어를 별로 사용하지 않고, 조선의 지나인(朝鮮に於ける支那人)이라는 용어를 많이 상용했다.


다음은 인천화상상회는 중국인의 조선 이주의 역사를 기자(箕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것은 앞에서 든 『조선화교개황』도 마찬가지인데 조선화교의 연원을 기자에 두고 있다.3) 이런 인식이 현대까지 이어져 1991년 출판된 楊昭全·孫玉梅의 『朝鮮華僑史』에도 “殷의 왕족 기자가 5천명을 이끌고 조선에 간 것이 조선화교의 시작”이라고 소개하고, 그때부터 근대, 현대까지를 포괄하여 조선화교의 역사를 개괄했다.4) 중국 학자의 동아시아 각 지역 및 국가의 화교사를 정리할 때는 고대의 중국인 이주 시기부터 거슬러 올라가 서술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인이 경제적 목적으로 대량으로 조선에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82년 10월 조선과 청국 간에 조청상민무역장정이 체결되면서 부터라는 것은 <화교의 조선 이주 연혁>에 “점차 무역 관계자가 청대부터 이주했”다고 기술한 부분이다. 인천화상상회는 인천화교 경제가 가장 융성한 시기를 1918년-1926년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화교 경제는 대체로 1910년대와 1920년대에 발전하여 1930년을 정점으로 1931년 7월 발생한 배화사건으로 급격히 쇠퇴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런데 인천화상상회가 조선화교 경제가 가장 융성한 시기를 1918년-1926년으로 인식한 것은 1927년 12월 전라도, 인천을 중심으로 발생한 제1차 배화사건의 피해가 인천화교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제1차 배화사건으로 인천화교의 피해는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931년의 제2차 배화사건에 비교하면 미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교민의 인구가 동 기간에 9만 명에 달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조선화교의 인구가 9만 명을 돌파한 것은 1930년이기 때문이다.5) 화상상회는 1935년의 인구를 4만 명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조선총독부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1934년 12월 말 현재의 인구는 4만9,334명, 1935년 12월 말의 인구는 5만7,639명이었다. 따라서 화상상회가 “4만 명에 불과하다”고 한 것보다는 실제 인구가 더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표 참고) 또한 1931년 7월의 배화사건 “이후부터 인구는 점차 감소”고 했지만, 1932년부터는 점차 인구가 회복되고 있기 때문에 사실과는 다르다.(표 참고) 동 사건이 화교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 주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주관적인 판단을 했을 수 있다.


한편, “교민의 원적(原籍)별 분포는 대부분 산동성 출신이고, 기타 지역은 모두 합해도 많지 않다.”고 했는데 이것은 정확하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1931년 12월 말 현재 화교 3만8,212명 가운데 북방(대부분 산동성 출신자)의 인구는 3만7,312명으로 전체의 97.6%, 남방(절강성, 호북성, 강소성 등의 화남지역 출신자)의 인구는 677명으로 전체의 1.8%, 광방(광동성 출신)의 인구는 223명으로 전체의 0.6%를 각각 차지했다.6)


인천화상상회의 <화교의 조선 이주 연혁>은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화교의 입장에서 그들의 이주사의 개략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표| 조선화교 및 인천화교의 인구(1909년-1944년)

연도

조선화교(A)

인천화교(B)

B/A(%)

1909

9,568

2,497

26.1

1910

11,818

2,886

24.4

1911

11,837

1,582

13.4

1912

15,517

1,844

11.9

1913

16,222

1,503

9.3

1914

16,884

-

-

1915

15,968

1,125

7.0

1916

16,904

1,173

6.9

1917

17,967

1,262

7.0

1918

21,894

753

3.4

1919

18,588

793

4.3

1920

23,989

1,318

5.5

1921

24,695

1,360

5.5

1922

30,826

1,786

5.8

1923

33,654

1,579

4.7

1924

35,661

1,713

4.8

1925

46,196

2,085

4.5

1926

45,291

2,072

4.6

1927

50,056

2,077

4.1

1928

52,054

1,922

3.7

1929

56,672

2,232

3.9

1930a

67,794

1,940

3.6

1930b

91,783

3,372

3.7

1931

36,778

1,469

4.0

1932

37,732

1,502

4.0

1933

41,266

1,820

4.4

1934

49,334

1,884

3.8

1935

57,639

2,291

4.0

1936

63,981

3,265

5.1

1937

41,909

805

1.9

1938

48,533

1,064

2.2

1939

51,014

1,386

2.7

1940

63,976

1,749

2.7

1941

73,274

2,082

2.8

1942

82,661

-

-

1943

75,776

2,041

2.7

1944

71,573

1,938

2.7

출처: 이정희(2008), 「해방 초기 인천화교의 경제활동에 관한 연구」, 『인천학연구』제9호, 92쪽; 李正熙(2012), 『朝鮮華僑と近代東アジア』, 京都大學學術出版會, 10-11쪽을 근거로 작성 함.

  주:1930b의 인구는 조선총독부가 1930년 10월 실시한 국세조사에 의한 통계 임.



1) 可兒弘明·斯波義信·遊仲勳編(2002), 『華僑·華人事典』, 弘文堂, 105-106쪽.


2) 張維城·季達編譯(1930), 『朝鮮華僑槪況』, 中華民國駐朝鮮總領事館. 이 자료는 총 40쪽의 소책자로 당시 총영사인 장웨이청(張維城)과 영사인 지따(季達)가 편역한 것이다. 그 대부분의 내용은 1924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된 『朝鮮に於ける支那人』을 번역한 것이다.


3) 張維城·季達編譯(1930), 2쪽.


4) 楊昭全·孫玉梅(1991), 『朝鮮華僑史』, 中國華僑出版公司, 27쪽.


5) 정확한 인구는 9만7,183명이다. 조선총독부에 의한 국세조사에 의해 밝혀진 것인데 조사 시점은 1930년 10월이다. 朝鮮總督府(1934), 『昭和五年朝鮮國勢調査報告: 全鮮編 第一卷 結果表』.


6) 南滿洲鐵道株式會社經濟調査會(1933.9.15.), 『朝鮮人勞動者一般事情』, 27-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