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동북이야기 (5)    대련과 민국시기 일본 교역소

손승희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중국의 수많은 도시 중 요녕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대련만큼이나 독특한 이력을 가진 도시도 드물 것 같다. 국제 항구도시로서 상해에 비견되기도 하고, 당초 도시 건설이 제정러시아에 의해 ‘동방의 파리’를 추구하며 유럽풍으로 기획되었는가 하면, 동북아 물류의 중심지로서 ‘동북아의 홍콩’을 꿈꾸는 도시라는 점에서 그렇다. ‘청니와’라 불리던 작은 어촌은 1898년 삼국간섭의 대가로 러시아가 이 지역의 조차권을 얻으면서 개발되기 시작했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남만주철도를 경영하게 되면서 관동주로서 ‘대련’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후 러시아의 도시계획을 답습한 일본에 의해 상업, 무역 위주의 경제 활동 중심지로 조성되었다. 초기 개발 자체가 외국인의 손에 의해 의도적으로 기획되었다는 사실은 식민의 아픔이 있는 한국인들에게 동병상련의 동질성을 갖게 하지만, 정작 대련은 한국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초기 대련사회는 중국 내지에서 온 다수의 중국인 이민과 일본 국내의 인구 압박 해소책으로 동북에 온 일본인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소수의 조선인과 외국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련은 봉천(지금의 심양), 영구(營口) 등 동북의 다른 도시에 이미 중국의 전통사회가 형성되고 상업이 발달했던 것과는 달리 모든 것이 새로 기획되고 형성된 도시였다. 말하자면 대련은 국내외 각지의 이민과 그들의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며 상호관계 속에서 형성 중에 있던 사회였다. 특히 내지에서 온 중국인 이민에게는 상업적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다. 그것은 일본인 이민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일본인에게는 제국신민으로서의 우월감을 과시하고 근대화의 혜택을 향유할 수 있는 땅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 여러 집단이 공생공존하고 있던 대련사회는 이주민에게 있어 생존과 직결되는 생계 압박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녹녹치 않은 곳이기도 했다. 당시 대련의 이주민들에게 치열한 삶의 현장이자 새로운 기회의 공간이 존재했다면 그중의 하나는 바로 대련의 일본 교역소(이하 교역소)였을 것이다.


대련은 청말민초를 거치면서 국제 수출항으로서 발전했다. 동북의 수출품 중 60%이상이 대련항을 통해 수출되었는데 가장 많은 수출량을 보였던 것은 대두제품이었다. 동북의 대두제품은 동북에서만이 아니라 당시 전 중국의 수출품 중 1위 상품이기도 했다. 그 대두제품이 거래되었던 교역소는 화상(華商)에게나 일상(日商)에게나 생존과 직결되는 삶의 터전이었다. 지금은 ‘대련은행’으로 사용되고 있는 그곳은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탁 트인 항만광장에 위치하고 있다.


대두산업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20년대는 대련교역소가 상당히 활성화되어 있었다. 교역소가 설립되기 전, 곡물의 거래는 화상의 자치조직인 공의회(公議會) 소속 양시(糧市)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양시에 출입할 수 있었던 것은 회원들뿐이었고, 회원은 화상에 한했다. 일상이 양시에서 거래하고자 하면 화상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대두의 집산과 분산과정도 화상 곡물거간 양잔(糧棧)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상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불합리한’ 구조를 타파할 필요가 있었다. 그 한 방편이 근대적 교역소를 설립하여 화상을 교역소 안으로 흡수함으로써 일상까지 포함하여 대두의 유통과 거래구조를 재편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13년 대련에 관영 ‘대련중요물산교역소’가 성립되었고 교역소신탁회사가 부설되었으며, 이어서 개원, 장춘, 공주령, 사평가 등지에도 교역소가 설립되었다.


대련중요물산교역소


근대성을 표방하며 설립된 일본 교역소는 공정거래를 명목으로 계약의 이행을 돕고 투기를 차단하기 위한 각종 규정과 보증금 제도를 두었다. 교역소 설립 이전 화상의 양시에서도 규약을 제정하여 대두 거래를 통제하긴 했지만 그 규약이라는 것 자체가 주로 수수료 규정이었을 뿐, 투기세력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한 제도적인 안정 장치나 위약이 발생했을 경우에 대처하기 위한 보증금 규정은 아니었다. 일본과 구미의 대두제품 수요의 급증으로 인해 당시 동북의 어느 지역이나 대두 거래는 투기적인 성격이 농후했고 관에서 금지해도 쉽게 단절되지 않는 실정이었다. 어떤 경우는 투기세력이 관과 결탁하여 대두의 시세를 좌지우지 하는 경우도 있어 폐해가 극심했다. 그러므로 그 성과 여부와는 상관없이 일본 교역소의 설립은 공정거래를 확립하고 투기를 억제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설립되었던 것이다.


대련의 일본 교역소에서는 현물, 선물거래를 막론하고 교역소에서 거래하도록 규정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현물거래는 장외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선물거래의 경우에는 반드시 교역소에서 교역인을 통해 거래하도록 규정되어 있어, 대두제품을 사든 팔든 중개하든 선물거래를 이용하려면 교역소를 통해야만 했다. 선물거래는 거래가 성사되면 자동적으로 교역소신탁회사와 담보계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에 거래가 성사된 후 완전히 이행되기까지의 책임은 신탁회사가 졌다. 대두제품을 거래하는 상인에게 기본적인 안전장치가 마련되었던 셈이다. 다만 각종 수수료나 보증금의 명목으로 거래 비용이 증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련 교역소는 화상들을 교역소 안으로 흡수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선물거래의 혼란을 제도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분과 당위성만 가지고는 화상을 교역소 안으로 완전히 편입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화상에게 교역소 이용의 장점과 편리성을 제공하지 않으면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화상의 상관행을 대폭 수용하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일본이 중국인의 상관행을 수용했던 가장 대표적인 예는 교역소의 기준화폐를 은본위 화폐인 ‘초표(?票)’로 정했다는 것이다. 동북은 화폐가 통일되어 있지 않았던 탓에 교역소의 거래를 위해서는 기준화폐를 정할 필요가 있었다. 금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있던 일본은 당초 조선은행 발행의 ‘금표(金票)’를 기준화폐로 정하기를 원했지만, 중국이 은본위 화폐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부합하는 요코하마정금은행 발행의 ‘초표’를 그 기준화폐로 정했던 것이다. 화상의 반대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지만 이것은 임시적인 조치였을 뿐, 일본이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금표를 채택하여 일본 내지와의 폐제 통일을 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상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장 기준화폐를 금표로 바꿀 수는 없었다. 금표를 기준화폐로 정한다고 발표를 하기만 하면 교역소의 화상 거래가 갑자기 뚝 끊기는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에 들어 대련에서 금표 사용이 점차 증가하게 되자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은 1921년 4월, 동년 10월 14일부터 대련교역소의 기준화폐를 금표로 바꾼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관련업계 종사자들은 일시에 큰 충격에 빠졌고 관련 주식은 폭락하고 입회가 정지되는 등 대련 경제계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관련업계 종사자들이 이에 대해 결사반대했고 심지어는 화상공의회 대표들이 일본에 가서 일본정부에 청원하고 장작림정권에도 도움을 청하는 등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의 논리는 관동청이 아무리 대련의 행정권을 행사하는 주체라고 할지라도 그 주민은 전통적으로 중국의 습관에 따라 생활하고 상거래를 하는 화상들이기 때문에 중국의 상관행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교역소는 1923년부터는 초표와 금표 양자를 모두 인정한다고 최종적으로 고시했지만, 실제로는 초표가 주로 통용되었다. 이는 중국 상거래 관행의 견고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일본은 중국의 상관행을 흡수하는 방법으로 화상을 교역소 안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교역소를 바라보는 화상의 입장은 어땠을까? 만철 성립이후 주변지역이나 중국 내지로부터 많은 화상들이 대련이나 만철부속지(이하 부속지)로 이주해왔다. 대두 집산지가 만철연선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두수송의 편리성을 향유하고, 일본의 지배하라는 사실을 이용하여 중국측 세금을 탈세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이들은 일본 관동청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업적 기회를 얻을 목적으로 대련이나 부속지로 이주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대련과 부속지의 화상단체는 각각 화상공의회와 화상상무회에 소속되어 있었고, 이들을 통제하고 최종적으로 감독했던 것은 만철이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교역소가 화상들에게 불편과 불이익을 주는 존재라면 화상은 언제든 상업적인 이익을 위해 다른 지역의 중국측 양시나 교역소로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금표가 기준화폐로 확정되자 실제로 대련을 떠나 영구로 이동하는 상인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역소가 초표 사용을 유지하는 등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한, 화상들 스스로도 이윤의 창출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대련에 남아 일본 교역소를 기꺼이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1)


따라서 대련 교역소가 발전하고 활성화되었던 것은 교역소가 중국 상관행을 수용했던 측면과 거래의 안정성을 보장받으려는 화상의 교역소 이용이라는 현실적인 선택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이룩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대련이라는 도시의 성격 자체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외세에 의해 도시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중국의 전통사회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탓에2) 대련은 전통과 근대, 중국과 외세라는 갈등적 요소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게다가 통상 이민사회가 그렇듯이 대련은 대다수가 다양한 국적, 다양한 환경의 이민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위 ‘텃세’라고 할 만한 기득세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따라서 대련은 도시 형성부터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던 데다가, 일본이 제시한 ‘교역소’라는 근대적 상업 시스템을 새로운 성장의 동력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대련이라고 하는 새로운 도시로 이주하여 삶을 개척했던 많은 화상들은 일본의 식민지배에도 불구하고 대련의 자유로운 분위기, 새로운 이윤 창출의 기회, 근대화의 수혜를 향유했던 것이다. 일본의 동북에 대한 일원적인 지배가 보편적이었던 만주국시기에는 더 많은 인적, 물적 수탈과 침략이 있었지만, 외세 침략의 역사적 상흔도 관광지로 개발하는 중국인들의 특성은 대련을 국제적이고 현대적인 도시로 성장하게 했던 것이다. 역사의 무게에 주눅 들지 않고 근대화의 혜택을 한 몸에 받은 개방성이야말로 대련사회의 활기와 역동성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1) 일본 교역소와 관련되는 내용은 졸고 「20세기 초 중국 동북의 대두 거래관행과 일본 교역소의 설립」, 『중국근현대사연구』 62(2014.6)에서 부분 발췌함.


2) 대련의 도시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이상균, 「일제 식민지 해항도시의 근대적 재편성 연구: 한국 부산과 중국 대련의 비교연구」, 『해양도시문화교섭학』 9(201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