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동북이야기 (4)    동북의 곡물거간 “양잔(糧棧)”

손승희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동북사회는 근대에 들어와서 급속히 성장했다. 근대 동북사회 형성의 초기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철도의 부설이었다. 철도는 화북지역으로부터 이민을 실어 날랐고 이들은 철도 주변에 정착하여 이민사회를 형성했다. 중국 내지에서는 대도시를 연결하기 위해 철도가 부설되었다면, 동북에서는 철도의 부설이 곧 도시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따라서 철도와 이민은 서로 상승작용을 하며 동북 사회 형성을 가속화시켰다.


여기에 하나 더, 철도를 종횡으로 부설케 하고 중국 내지로부터의 이민을 촉발시켜 동북사회를 성장시킨 또 하나의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두”였다.1) 대두경작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많은 이민을 단시일 내에 동북에 흡수할 수 있었을까? 대두의 수송이 아니었다면 동북에 그렇게 많은 철도가 필요했을까? 동북의 대두는 처음부터 당지의 수요가 아니라 중국의 내지 혹은 일본, 구미 등지에 수이출되기 위한 상품으로 개발되었다. 청대 중기부터 시작된 동북 대두제품의 상품화는 대두 생산의 증가로 이어졌고, 대두 생산의 증가는 곧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이것이 곧 내지로부터의 이민을 촉발시킨 2차적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과 유럽의 대두제품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920년대에는 대두산업의 전성기를 구가케 했다. 동북의 각 지역에서 생산된 대두는 마차로, 철도로 부지런히 운송되어 대련, 블라디보스톡 등을 통해 수출되었다. 1926년 무렵 전 세계 대두생산량의 약 60%가 동북산이었다. 상당한 고수익을 자랑했던 만철의 가장 큰 수입원도 대두수송이었다.


따라서 근대 동북사회는 대두와 함께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두경제”라는 말이 근대 동북 사회경제의 성쇠를 파악하는 하나의 키워드로 활용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철도와 이민이 동북 사회경제 구조의 골격을 형성한 것이라면, 대두는 동북사회 각 계층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주었던 혈관과도 같은 존재였다. 대두는 동북의 농촌사회에서부터 국가권력에 이르기까지 각 층위를 구조적으로 연결시켜 주었던 역동적인 기재였기 때문이다.

대두가 수없이 많은 혈관이 되어 동북의 농촌과 도시, 기층과 권력, 농민과 수출상 등을 연결시켰던 것은 곡물거간 “양잔”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양잔은 동북의 대두가 국제상품화 되고 대두가공업이 전문화, 영업화 되면서 그 유통과정에서 흥기한 업종이었다. 특히 동북의 대두는 수출상이 내지에 들어가 농민과 직접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농민에서 지방양잔, 지방양잔에서 집산지 양잔, 집산지 양잔에서 대두가공업자 혹은 수출상에게 매각되는 일련의 유통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수출되는 대두는 반드시 양잔을 거쳐야만 하는 구조였다.


이렇게 양잔이 생산자와 지방양잔, 집산지양잔, 대두수출상 사이를 종횡으로 누비며 대두 유통구조를 장악했던 것은 동북의 독특한 통화시스템이 그 한 원인이었다. 동북은 통화가 통일되어 있지 않아 지역마다 달랐고, 동북이 개방적인 국제사회였기 때문에 수출항에서는 국제화폐도 통용되는 실정이었다. 예를 들어 봉천성의 농촌에서는 대두가 유통될 때 “봉천표(奉天票)”라는 지역화폐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불환지폐였다. 때문에 대련 등의 수출항에서는 통용되지 않았고 대신 초표(?票), 금표(金票) 등 국제화폐가 통용되었다. 통화 불일치로 인해 화폐는 일상적으로 교환되어야 했다. 이러한 문제가 양잔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고 양잔으로부터 융자도 받을 수 있었다. 금융기관이 발달되어 있지 않은 동북에서 양잔은 금융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양잔은 생산지 농민에게서 대두를 매입하고 현금을 제공하는 동시에 농민에게 잡화를 공급하는 역할도 했다. 양잔은 대두 매입자를 구하는 일에서부터 매매계약서의 작성, 현물의 계량과 검사, 현물의 인도와 대금납부 등 매매에 관한 모든 절차와 과정을 대신 처리해주었다. 이러한 과정과 절차에 익숙하지 않은 농민에게 양잔은 필수적인 존재였다. 대두가공업자나 수출상의 입장에서는 대량의 대두가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수많은 농민과 거래를 해야 하는 번거로운 문제를 해결해 주었던 것도 양잔이었다. 또한 생산지와 거리가 멀어 농민의 신용정도를 알 방법이 없는 집산지 양잔에게 이를 제공해주었던 것도 양잔이었다. 따라서 양잔은 주로 철도주변, 항구, 집산지에 설치되어 생산자 농민에서부터 대두가공업자, 대두 수출상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연결을 도모했던 중간상인이었다.


대두의 유통을 장악하고 있던 양잔은 당시 동북에서 가장 유력한 재화 축적 수단 중의 하나였다. 이들은 지역통화와 국제통화의 환전을 통해 부를 축적했고, 대두의 선금 지불 대가로 받은 현물인환증서를 전매하거나, 대두를 양잔의 원내에 쌓아두었다가 시세앙등을 기다려 매각함으로써 부를 축적했다. 그러므로 양잔의 상업이익 축적은 군벌, 지주, 고리대업자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장작림의 동북정권도 대두유통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이는 곧 ‘관상(官商)’을 통한 대두유통의 장악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관상이란 정권과 특수한 관계에 있는 상인을 지칭하는 말로, 각 역사시기마다 종종 등장해왔지만 동북에서는 독특한 형태의 관상이 발달했다.


동북에는 각성의 중앙은행격인 “관은호(官銀號)”라는 기관이 존재했다. 동삼성관은호(東三省官銀號), 길림영형관은전호(吉林永衡官銀錢號), 흑룡강광신공사(黑龍江廣信公司)가2) 그것이다. 이들은 화폐 발행을 비롯하여 성내의 태환(兌換)과 각종 화폐의 매매, 대출, 예금, 창고, 금융 등의 은행 업무를 취급했다. 각성 재정청 관할 하에 정부의 모든 기금과 세수를 보관하는 역할도 담당했으며 그 수장인 독판은 각성 재정청장이 겸임했다. 그러나 동북의 관은호는 은행업무만 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은행 업무 이외에 직간접적으로 양잔이나 기타 부속사업을 겸영함으로써 수익을 올렸다. 1932년 현재 동삼성관은호는 26개, 1928년 길림영형관은전호는 40여개, 1927년 광신공사는 26개의 부속사업을 경영하고 있었다. 특히 양잔 경영은 막대한 수익성을 보장해 주었다. 화폐 발행권을 가진 관은호가 대두 매입을 위해 화폐를 증발하고 대량의 대두를 유통시킴으로써 대두유통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상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봉천성이었다. 장작림정권은 동삼성관은호의 부속사업이라는 “관상”의 활동을 통해 화폐를 자유롭게 발행하여 대두를 매점함으로써 필요한 군비와 재정자금을 확보했다. 관상은 각성의 관은호가 경영하는 양잔 뿐 아니라 지역 유력자들이 개인적으로 출자하여 양잔을 경영하는 경우도 포함되었다. 이렇게 해서 관상의 활동은 동북 지역 유력자들의 개인적인 부 축적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장작림의 동북정권을 재정적으로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대두와 동북정권, 그리고 금융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관상은 대두 매입시기가 되면 각 관은호로부터 대두 매입자금을 공급받았다. 그러나 일반 양잔의 경우는 은행업자, 창고업자, 교역소신탁회사로부터 자금을 조달받거나 연호(聯號: 일종의 연쇄점)관계를 이용했다. 동북의 양잔은 다른 영업을 겸업하거나 연호관계를 가진 경우가 많았다. 특히 양잔이 대두거래에 필요한 화폐나 혹은 사업자금을 얻기 위해서는 연호관계가 필요 불가결했다. 연호는 동북 내에서 뿐 아니라 중국 내지에 점포를 가진 상업자본이 직간접적으로 동북의 주요 도시에 분점을 설치함으로써 동북으로 진출한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중국 내지와 동북이 연호관계를 통해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동북에 연호가 특히 발달했던 것은 국가가 개인의 재산을 보호해주는 법적장치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상인들이 공동경영을 통해 재산의 안전성을 보장받고자 했기 때문이다. 연호는 주로 친척이나 친구 혹은 동향인이 공동으로 출자하여 경영하는 형태를 띠었다. 연호는 총호 아래 동북의 각 지역에 분호와 지호를 설립하여 각종 수익사업을 경영했다. 연호관계에 있는 양잔은 인적, 물적 네트워크를 확보함으로써 성내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더욱이 양잔 연호가 권력과 밀접한 “관상”인 경우, 그 세력은 막강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영자호(永字號)와 광신공사(廣信公司)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각각 길림영형관은전호와 흑룡강광신공사의 연호였다. 즉 이들은 관상이면서 동시에 연호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전술했듯이 양잔에 의해 다양한 방법으로 축적된 부는 다시 각지의 직?방계 연호조직으로 확대되었다. 양잔 네트워크의 범위는 전 동북지역이었고 연호관계를 통해 자금과 물자가 종횡으로 유통되었다. 이렇듯 대두를 매개로 형성된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양잔은 동북사회의 경제발전을 견인하는 거대한 상인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양잔을 통한 대두의 이러한 폐쇄적인 유통구조는 동북에서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했던 일본상인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생산자-지방양잔-집산지양잔-대두가공업자(혹은 수출상)라는 구조 속에서 양잔이 농촌을 장악하고 있어 일본상인의 침투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더욱이 각 관은호가 화폐 증발을 통해 대두를 매점하거나 지역화폐와 국제화폐의 교환으로 막대한 이익을 보는데 비해 일본상인은 그 혜택을 누릴 수 없다는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일본은 만철의 현지조사를 통해 어떻게 하면 이러한 유통구조를 바꿀 수 있을지 그 방책에 고심했다. 결국 만주국 성립 이후 일본은 금융합작사를 조직하여 농민들에게 융자를 해줌으로써 양잔의 금융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대신하도록 했고, 각 현 단위로 대두를 공동판매하게 함으로써 집산과 분산과정에서 양잔을 배제시켰다. 또한 일본 수출상들은 직원을 내지에 파견하여 직접 대두를 구입함으로써 양잔의 업무를 무력화시켰다. 게다가 수출에 의존했던 대두산업은 1930년대에 들어와서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세계 경제공황의 여파와 은가의 폭락으로 인해 수출 판로가 경색되고 대두가격이 폭락했기 때문이다. 이는 동북정권의 지지와 연호관계를 배경으로 했던 관상 양잔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거대 양잔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만주국에 의해 각성 관은호는 만주중앙은행으로 병합되었다. 이제 중소 양잔만 남게 되어, 양잔을 통한 대두 유통구조의 장악이라는 종전의 상황은 더 이상 재현되지 않았던 것이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http://www.tj.xinhuanet.com/jxtj/2004-03/11/content_1763382.htm

http://image.baidu.com



1) 대두 뿐 아니라 두병(豆餠: 콩깻묵), 두유(豆油)를 포함한 대두삼품(大豆三品)을 의미한다. 


2) 1930년 흑룡강성관은호로 개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