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국가 통치에서의 전통적 ‘사회 자조직’의 지위와 역할

중국 국가통치 중 전통적 ‘사회 자조직’1)의 지위와 역할

장이화(姜義華) 씀 _ 중국 복단대 역사학과*

손승희 옮김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1 _ 전통 풀뿌리 사회와 국가통치


전통적으로 중국 大一統의 국가 통치이념이 신봉했던 것은 일종의 엘리트주의였고, 사회 엘리트들을 통해 국가 전체가 동원되고 통제되고 관리되었다. 그러나 국가 정권의 구축은 기껏해야 縣까지였다. 오히려 국가 기층 관리의 책임을 맡은 자들은 실제로 상당히 강고한 자치 역량과 초안정적인 풀뿌리 사회를 가지고 있었다.


전통 풀뿌리 사회는 혈연관계의 가족, 친속, 지연관계인 鄕黨, 業緣관계인 行會, 동일 신앙의 민간종교 등을 포함한다. 동일 私塾, 동일 書院에서 수학하고 동일 스승에게 배움으로써 소위 학연관계의 동창, 동문을 형성했고 공통의 취미 혹은 유사한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각양각색의 社團(사회단체)이나 형형색색의 각종 幇會를 결성했다. 가장, 족장, 지방 신사, 지방 능력자 혹은 소위 지역의 우두머리들은 항상 그들의 영도자가 되었다. 


이러한 풀뿌리성이 강한 ‘사회 자조직’은 家訓, 家規, 家風, 族規, 族約, 鄕規, 鄕約, 行業章程, 기타 각종 성문, 불문의 규제를 가지고 관련 민중을 효과적으로 동원하고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직들은 국가가 ‘덕치와 예치를 실천할 때’**2) 가장 잘 자각하고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견실한 사회 기초역량이 되었다. 이들은 공통 신앙과 습속, 공동재산, 공공사업, 공동 활동을 통해 기층사회의 수많은 모순을 해결했고 기층사회의 번거롭고 복잡한 각종 관계를 조절했다. 이들은 사회 응집력을 강화하고 기층 사회질서를 안정시킴으로써 역대 왕조의 국가정권이 기층에서 행했던 효율적 통치의 중요한 지주가 되기도 했다. 더욱이 ‘하늘은 높고 황제는 먼(天高皇帝遠)’***3) 상황에서, 광대한 풀뿌리 민중 역시 그 속에서 서로 종횡으로 교차되고 뒤얽힌 다양한 네트워크에 의지하여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고 통치계급의 각 엘리트들이 제멋대로 하지 못하도록 제약하는 역할을 했다.


1家 1戶로 분산된 풀뿌리는 항상 고립무원이었고 나약하기 짝이 없었지만 일단 단체를 결성하게 되면 군체의 역량을 배경으로 더 이상 나약하지도 고립무원도 아니게 되었다. 즉 ‘사회 자조직’의 도움에 힘입어, 길 닦고 다리 놓고 서로 간에 물자를 유통했으며(互通有無),****4) 국가 권력이나 관료 엘리트들이 각종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제어하기도 했다.


역대 왕조는 정치가 잘 다스려 질 때는 일반적으로, 하층의 풀뿌리에 관심을 두고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하다(民惟邦本, 本固邦寧)’*****5)를 실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비교적 분명했다. 그러나 나중에 엘리트들은 점차 특수한 권익을 향유하는 특수계층이 되었고, 하층 풀뿌리 사회에서 탈피하여 점점 멀어지다 급기야는 완전히 대립되는 데에 이르기도 했다. 군주, 관료 기구는 점점 방대해지고 소비욕은 커져갔으며 민중에 대한 수탈은 끝이 없었다. 그들은 이미 사회 엘리트에서 사회의 좀벌레로 탈바꿈했던 것이다. 덕치와 예치가 폐기되고 법치가 파괴되어 사회의 사악한 세력이 점차 창궐하게 되면 사회 풀뿌리들은 합법적인 길로는 이미 자신의 이익을 수호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들은 ‘사회 자조직’의 결집을 통해 작고 분산적이고 국부적인 반항에서 시작하여 점점 더 큰 규모의 농민폭동, 농민기의, 농민전쟁을 발동했다. 그들은 구 왕조를 전복하고 원래의 관료기구를 타파했으며 이미 사회의 좀벌레가 되어 버린 군주관료를 소탕하고, 군중의 격렬한 행동을 통해 엘리트의 대오를 중건했다. 그리고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하다’는 국가 통치이념을 다시 한 번 실현하고자 했다.


신왕조 초창기에 아래로부터 일어났던 하층 풀뿌리 사회 초야의 영웅들은 원래 풀뿌리에 속했지만, 보통 그들은 신왕조 건립의 공신이 되었고 신분이 상승하여 신왕조 사회 엘리트의 일부분이 되고 중견역량이 되었다. 그들은 어느새 특권을 향유하고 특수이익을 옹유하게 되었지만 그들이 원래 풀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하층 풀뿌리의 고통을 몸으로 이해하고 상대적으로 이들의 요구를 깊이 이해했다. 이로 인해 이들의 요구를 만족시키는데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다. 풀뿌리들의 이러한 중대한 행동이 성공한 후, 뒤따르는 것은 또다시 소위 ‘盛世’를 창건하는 일이었다.


이상과 같이, 풀뿌리들의 ‘사회 자조직’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하다’는 국가 통치이념의 실천 과정에서 그 작용이 결코 소홀히 취급되거나 저평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대한 기층 민중은 항상 이러한 조직의 형식을 빌려 그들이 역사의 창조와 변화 과정에서 어떤 궁극적인 의의와 가치를 가진 결정적인 역량인지를 드러내곤 했기 때문이다.


2 _ 풀뿌리 ‘사회 자조직’의 와해와 변형의 중건


도시와 농촌의 전통적 ‘사회 자조직’의 쇠락과 소멸은 청말 근대 공업의 흥기와 신흥 시장의 형성, 새로운 형태의 상회, 行業公會(동업조직), 工會(노동조합)의 굴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민국시기, 민국정부는 일부 지역에서 保甲制度를 실시하여 몇 천 년 동안의 ‘皇權이 縣 아래에는 미치지 않는다(皇權不下縣)’는 공식을 타파했고 중앙 정치권력이 중국 기층사회에 침투하도록 했다. 정부는 農復會를 특설하고 合作社法을 제정하여 農本局을 설립했으며, 관 주도의 조직과 기구를 이용하여 전통적 ‘사회 자조직’을 대체했다. 한편, 중국공산당이 발동한 ‘토호를 타파하고 토지를 분배한다(打土豪, 分田地)*6)’를 기치로 한 농민폭동, 농민전쟁 및 혁명근거지 확립(紅色割據)은 점차 격렬해졌고, 이에 따라 혁명과 반란을 기본사명으로 하는 農會는 중국 농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조직이 되었다. 1946년에서 1956년 사이 ‘사나운 폭풍우’ 같았던 ‘토지개혁운동’과 농업합작화운동이 전국을 휩쓸자 예전의 ‘사회 자조직’의 핵심이자 주체였던 토착신사, 鄕賢, 가장, 족장 등 향촌 엘리트들이 유래 없이 소탕되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원래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왔던 각종 ‘사회 자조직’이 완전히 궤멸되었고 당 영도 하의 농회는 직접적으로 농업 합작사와 政社合一의 인민공사 조직으로 대체되었다.


1963년 이후, 농촌 사회주의 교육운동 과정에서 정치를 청산하고 경제를 청산하고 조직을 청산하고 사상을 청산한다는 ‘四淸運動’이 전개되면서 광대한 전국의 농촌에는 貧下中農協會가 보편적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회 자조직’은 아니었다. 그것은 농촌에서 ‘계급대오’를 중건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를 향한 탈권적 ‘계급투쟁’이었다.  


1966년에 시작되어 10년이나 끌었던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수천 수백만 군중 조직이 등장했다. 이러한 군중조직은 혁명과 반란의 깃발을 들고, 한편으로는 각급 당정기관과 영도자에 반대했으며,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특수 요구를 제시하며 그럴싸한 구호로 자신들의 특수 이익을 꾀하고자 했다. 그들은 서로 분열되기도 하고 투합하기도 하며 충돌은 계속되었고, 결국엔 전국적인 전면 내전으로까지 치닫게 되었다. 사실 그들은 특수한 상황 하에서 상당히 특수한 형식으로 나타났던 일종의 ‘사회 자조직’이었고, 지독히 강한 풀뿌리 근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조직의 상당 일부분은 한동안 위력이 대단했고(叱咤風云)**7) 그들은 스스로 국가를 주재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하나하나 실의에 빠져 돌아왔고(斷羽而歸), 깃발을 내리고 북을 멈추었다(偃旗息鼓). 이러한 조직들은 기껏해야 정치투쟁의 도구이자, 역사의 過客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기층 민중에게는 ‘사회 자조직’은 여전히 그들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염원이고,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그들은 각종 형식을 통해 새로 결집할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표명한 것이었다.


3 _ 근대 ‘사회 자조직’의 건설과 그 책임


공업화, 도시화, 시장화, 세계화는 각 사회의 구성원을 극도로 사회화시켜 이제는 어느 누구도 시장과 사회적 생산의 위치에서 떨어져 나와 고립무원의 존재가 될 수 없게 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극도로 파편화되어 전체 사회적 생산과 사회 분업과정에서의 한 조각이고 한 부속품일 뿐이다. 고도의 사회화와 고도의 파편화가 결합되어 필연적으로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사회관계,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시민사회 혹은 ‘사회 자조직’이 형성되었다.


새로운 형태의 ‘사회 자조직’의 발육과 성장은 근대 사회가 건강하게 운행되고 있다는 중요한 기초이고 필요한 조건이다. 정보화 시대에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점점 허상화 되고 사람마다 모두 이기적이고, 탈중심화, 탈전체화, 탈본질화 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사회 자조직’을 건설하는 것은 잠시도 늦출 수 없는 일이다. 公民社會(시민사회)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 자조직’은 근대 시민 혹은 대중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관계가 긴밀하거나 혹은 느슨한 단체이다. 이들은 대부분 근대사회 발전의 필요에 맞게 사회역량을 적극 통제하고 사회 이익을 균형 있게 하며 사회관계를 조절하고 사회행위를 규범화할 수 있다. ‘사회 자조직’ 내부를 자율적으로 적절하게 통제하고 조직 구성원이 자체적으로 스스로를 관리하고 서비스하고 조절하고 감독하게 하며, 조직 내외의 대다수 구성원들의 합법적인 권익을 보장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사회 자조직’은 자신들이 만든 각종 규약과 군중의 자발적인 참여에 힘입어 도덕과 예의 수립을 강화하고, 각종 사회사업을 일으켜 공공 이익을 유지하면서 소외된 군중을 구제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회 자조직’은 위법과 범죄를 예방하고 건전한 사회 모순 예방시스템, 이익에 대한 합법적 표출 시스템, 異見에 대한 협상 소통시스템이라는 면에서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기초적인 역할을 한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 자조직’도 어떤 특수한 정치세력, 사회세력, 경제세력에게 이용되어 그들의 특수 이익을 꾀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이 출현하여 만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회 자조직’과 국가권력의 법이 서로 상호 작용하고 감독하고 견제하는 관계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중국의 현상을 보면,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 자조직’은 어떤 부분은 이미 冠禮를 올릴 만큼 성숙해졌고 어떤 부분은 비틀비틀하면서 배우고 있고(??學步) 상당 부분은 잉태 중에 있다. 종합적으로 보면, 중국 근대화의 부단한 진전과 더불어 ‘사회 자조직’은 낙관적으로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다.



* 姜義華 교수는 중국 복단대학 역사학과 資深特聘敎授이다. 자심교수는 학문적 업적이 높은 원로교수에게 부여하는 칭호로 그 수가 많지 않다고 한다.-역자

1) 저자에 따르면 ‘社會 自組織’은 민중의 자연발생적 혹은 자발적인 조직으로, 그 범위는 血緣의 가족, 종족, 地緣의 同鄕會, 業緣의 同業公會, 상회 등은 물론, 노동조합, 학회, 살롱, 클럽, 독서회 등 상당히 광범위하다. 일반적으로 자율, 자치, 자주적인 조직을 지칭한다는 의미에서 ‘사회 자조직’은 ‘민간조직’과 유사하다. 그러나 ‘민간조직’은 가족, 종족까지 포함하지 않지만 ‘사회 자조직’에서는 가족, 종족의 자연발생적인 조직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사회 자조직’은 자율적인 통제 원리에 의해 운용되는, 공동체의 자율적 관리 시스템으로서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역자

2) 『論語』 爲政編 제3장 ‘道之以德, 齊之以禮, 民有?且格’에서 나온 말로 ‘백성을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다스리면 백성은 부끄럼을 알고 격식이 있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역자

3) 중앙정부의 통치역량이 먼 지역까지 미치지 못하는 상황을 말한다.-역자

4) ‘互通有無’는 唐代 韓兪의 『原道』 중 ‘爲之賈, 以通其有無’에서 나온 말로, 자신의 여분을 가지고 부족한 것을 서로 교환한다는 뜻이다.-역자

5) ‘民惟邦本, 本固邦寧’은 『書經』에 나오는 말이다.-역자

6) 1927년 이후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中國工農紅軍이 혁명근거지에서 토지혁명 할 때 사용했던 구호이다.-역자

7) ‘熾磐叱咤風云, 見機而動’은 『晉書·乞伏熾磐載記論』에 나오는데, 크게 꾸짖는 소리에 바람과 구름이 변색한다는 뜻으로 소리와 위력이 매우 큰 것을 형용하는 말이다.-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