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난민과 화교

노영순 _ 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HK조교수


오늘 관행포럼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키워드는 베트남 난민과 베트남 화교이다. 베트남 난민은 일반적으로 우리들에게 남베트남의 패망, 통일공산 정권의 탄압, 이로부터 자유를 찾아 베트남을 떠나 망망대해를 헤매는 소형목선을 탄 이들이라는 이미지로 점철된 보트피플(Boat People)로 알려져 있다. ‘망국의 비극’이라는 서사 안에만 가두기에는 보다 깊고 복잡한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여기에서는 보트피플이라는 단어보다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 베트남 난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베트남 난민은 1975년 베트남의 통일을 전후해서 1995년까지 20여 년 간 육로와 해로를 통해 베트남을 떠나 한중일의 동아시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싱가포르를 포함한 아세안국가 그리고 홍콩의 난민캠프에 임시체류하거나 제3국에 정착하게 된 이들을 이른다. 이렇게 베트남을 ‘탈출한’ 난민은 160만 정도로 추산된다.


그렇다면 베트남 난민과 베트남 화교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통일베트남정권의 남베트남 사회주의화 과정에서 그 자본주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화교가 희생양이 되었다거나, 이념, 국경분쟁, 해양영토문제, 베트남 화교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중국과 베트남 간의 갈등이 공공연히 전쟁으로 악화되면서 베트남 화교가 베트남을 대거 탈출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화교가 베트남 난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나, 바로 이 사실로 인해 베트남 난민을 수용했던 아시아 제국의 태도가 극명히 달랐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오늘 관행포럼에서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사실을 드러내고, 베트남으로부터의 화교의 이주라는 측면에서 베트남 난민을 이해하는 시각이 줄 수 있는 함의를 고민해 보고자 한다.


먼저 베트남 난민 중에서 화교가 차지하는 비율을 문제 삼기 이전에 베트남 화교에 대한 간략한 이해가 필요하다. 베트남 화교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고 복잡하지만 1975년 베트남에는 대략 167만 정도의 화교가 있었다. 북베트남의 화교(1975년 17만 명) 대부분은 하이퐁-혼가이 지역과 꽝닌을 비롯한 중월 접경지역과 농촌, 그리고 중부베트남에 거주했다. 이들 대다수는 124개 광산에서 광부로 일했으며(약60%)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거나 소상업에 종사했다.1) 1975년 이전 북베트남은 점진적인 동화(베트남화)정책을 통해 화교를 서서히 베트남 사회로 편입시키면서도 조직이나 동원 면에서 베트남 화교에 대한 중국의 개입 여지를 일정 정도 남겨 두었다.2) 그 배후에는 중국과 베트남 간의 국가 간 관계가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1975년 베트남 남부에서 화교(150만 명)는3) 주로 현재의 호찌민시(당시 사이공과 쩌런 지역)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세력이었다. 이들은 쌀을 비롯한 남베트남 경제의 가장 중요한 생필품의 생산, 제조 그리고 유통 시장을 오로지하고 있었다. 응오 딘 지엠의 강제 귀화 정책을 우회하면서 그리고 베트남전쟁의 특수를 누리면서 이 화교 경제권은 더욱 급속도로 성장했다.4)


이들 베트남 화교 중에서 베트남 난민이 된 이들이 어느 정도인지는 앞으로 파악되어야 할 과제이다. 이들의 규모를 추정해 볼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잠정적으로 인구통계를 통해서이다. 베트남 난민이 대규모로 발생한 1979년 화교의 인구는 87만정도로 파악된다.5) 그렇다면 1975년부터 1979년까지 베트남 화교의 절반가량인 80만 명이 베트남 난민에 합류해 베트남을 떠난 것이 되며, 이는 전체 베트남 난민 160만 명 중에서 절반을 베트남 화교가 차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 방법은 아시아 제국에 도착한 베트남 난민 중에서 화교가 차지하는 비율을 통해 추산할 수 있다. “베트남화교난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이 우선 목적지로 선택한 곳은 중국과 홍콩 그리고 대만이었다. 1978년 4월에 시작하여 45만 베트남 화교가 육로를 통해 중국으로, 배를 타고 홍콩으로 행했다. 이 중 중국은 27만을 정착시켰으며, 홍콩은 14만4천명을 정착시켰다. 여기에 대만까지 포함한다면 민족적으로 연관이 있는 세 나라에 간 베트남화교난민은 거칠게나마 50만 정도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여기에 110만 정도의 베트남 난민이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 제국에 의해 구조?구호되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이들 중에 상당수가 ‘중국인’이었음을 시사하는 자료는 산재해 있다. 베트남 난민을 구호했던 부산난민보호소의 역사에서 215명이라는 최대이자 마지막 난민을 입소시켰던 1989년 자료에 의하면, 당시 수용하고 있던 289명의 가운데 중국인은 122명으로 42%를 차지하고 있다.6)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는 제3국의 정착 약속 없이는 베트남 난민의 임시 체류도 허용치 않았으며 해안에 접근하는 이들에게 발포하는 등 강경한 정책을 구사했다. 이에 대해 이들 국가들은 베트남 난민이 사실상 ‘중국인’으로 자국 국민의 강력한 반발과 그로 인해 민족갈등 유혈 사태를 낳을 수 있다는 안보상의 이유를 들었다. 향후 보다 면밀한 연구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동남아시아 제국에 도착한 베트남 난민의 절반 정도만 베트남 화교였다고 가정해도 이들의 규모는 55만 정도가 되며, 중국과 홍콩에 온 화교와 합하면 100만 명이 훌쩍 넘는다.


지면 관계상 여기에서는 자세히 언급할 수 없지만 오늘 포럼의 다음 내용은 바로 베트남 난민의 다수가 화교였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중국과 홍콩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세안 국가들이 이들을 임시 체류시키고 재정착 시키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있다. 간단하게 말해 중국과 홍콩의 베트남 난민에 적극적이고 우호적인 대책은 이들이 화교였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중국은 베트남 난민을 돌아온 교포를 의미하는 귀교(歸僑)라는 범주에 넣고,7) 독립 후 민족국가의 수립이라는 과제 앞에서 동남아시아로부터 추방되어 돌아온 여타 화교와 같이 취급했다. 홍콩의 베트남 난민에 대한 정책 변화는 UNHCR과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베트남 난민 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사실상 홍콩의 정책은 베트남인 난민보다는 화교베트남난민을 더 고려하고 예전 북베트남에서 온 이들보다는 남베트남에서 온 이들을 더 우대하는 과정에서 변화를 경험했다.


이렇듯 베트남 난민과 화교에 초점을 두게 되면 이제까지의 냉전의 구도와 이념적인 차원에서의 논의 과정에서 희석되어 버린 화교 문제를 발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이들 화교가 베트남이든 중국이든 국민국가의 틀 내에서 희생되거나 포섭되는 존재만이 아니라 제3의 공간을 만들면서 다시 이들 국가에 기여하는 이주하는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가진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베트남 난민이 되어 세계에 흩어진 베트남 화교는 이주와 재이주를 통해 중국에서의 개혁개방과 베트남에서의 도이 머이(??i m?i, ) 이후에 다시 이들 국가에 자본과 기술을 가지고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외에도 베트남 난민의 유입이라는 공동의 문제에 직면했던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각국이 이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얻은 자산이 무엇인지를 밝혀 장래의 난민과 화교 문제에서도 일정 교훈을 얻어올 수 있으리라 본다.



* 이 글에서 사용한 그림의 출처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blog.naver.com/boonsuck?Redirect=Log&logNo=120203248168



1) Le Van Khue, "Chinh sach cua Bac kinh doi voi Nguoi Hoa o Dong nam a"[동남아 화인에 대한 북경의 정책], Nghien cuu lich su, 4 (186), Thang 5-6, 1979, p. 9; Marjorie Niehaus, "Vietnam 1978: The Elusive Peace,"  p. 86.


2) E. S. Ungar, "The Struggle over the Chinese Community in Vietnam, 1946-1986," p. 598; Nguyen Manh Hung, "The Sino-Vietnamese Conflict: Power Play among Communist Neighbors," p. 1041.


3) 陳碧笙, 『世界華人簡史』, 廈門大學, 1991, p. 369.


4) Chang Pao-min, "The Sino-Vietnamese Dispute over the Ethnic Chinese," The China Quarterly, N. 90 (Jun., 1982), pp. 198-9; E. S. Ungar, "The Struggle over the Chinese Community in Vietnam, 1946-1986," p. 605. 화인의 인구와 경제력에 관한 통계는 가지각색이어서 필요한 범주의 통계를 찾는 작업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1950년대 베트남 인구의 8%를 점하고 있던 화인이 베트남 도소매업의 80%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한 통계에서 이들의 남베트남 경제 장악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Lim & David Branham, "Discrimination that Travels: How Ethnicity affects Party Identification for Immigrants," unpublished paper, 2002년 11월, p. 6.


5) 許文堂, 「越南華人社團及其文化活動」, 朱?源, 『東南亞華人社團及其文化活動之硏究(中華文化復興運動總會資助硏究報告)』北京:中央硏究員近代史硏究所, 1994, p. 263.


6) 『월남난민보호소운영 1988~1989』, 부산광역시 기록관 7-10-4-B-6 (6260272-99999999-000012, pp. 289.


7) Xiaorong Han, Exiled to the Ancestral Land: The Resettlement, Stratification and Assimilation of the Refugees from Vietnam in China, International Journal of Asian Studies, 10, 1 (2013), p.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