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버린 나무: 어느 중국 농촌마을의 사회변천

동윈성(董運生) 씀 _ 중국 길림대학 사회학과 교수

 손승희 옮김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2013년 여름, 길림대학 사회학과와 일본 나고야대학 환경학원의 교수와 학생들이 길림성 동풍현(東豊縣)에서 일주일간 현지조사를 실시했다. 동풍현으로 가는 길에 한눈에 들어온 것은 온통 푸르름으로 가득한 울창한 숲과 논밭이었다. 농민들의 집 뜨락에는 앞뒤로 나무와 화초가 가득 심어져 있어 마당은 그야말로 생기로 가득했다. 사하진(沙河鎭) 양순촌(良純村)에 들어서자 단정하고 깔끔한 도로, 여릿여릿한 화초들, 줄지어 선 버드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의 얼굴엔 만족감과 행복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눈앞에 한가득 푸른색을 마주하니 내 고향 하남 예북(豫北)의 한 농촌마을이 떠올랐다. 고향, 그것은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가장 마지막에 돌아갈 마음의 안식처리라.


1 _ 기억 속의 나무와 사라져버린 나무


내 고향 예북은 태극권의 발상지인 진가구(陳家溝)와 3리(里)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내게 있어 ‘나무’는 어린 시절 가장 인상 깊었던 것으로 고향 마을 어디에나 나무가 울창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샅길 양쪽엔 푸른 백양나무가 줄지어져 있었고 앞마당 뒷마당엔 느릅나무와 오동나무, 참죽나무로 가득했다. 몇몇 장면들은 아직까지도 눈에 선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천으로 눈을 가리고 논두렁 감나무 위에서 술래잡기를 하던 일, 여름밤 횃불을 들고 수풀 속을 더듬던 일, 학교 교정의 수백 년 된 오동나무를 둘러싸고 빙빙 돌던 일... 그래서 나무는 내 어린 시절의 표상이었고, 그 시절의 표상이었다.


얼마 전 고향을 방문했을 때, 문득 기억 속의 나무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앞마당 뒷마당의 나무들이 사라진 것이다. 고샅길의 나무도 듬성듬성해졌다. 그토록 익숙했던 고향의 사방을 둘러보니 문득 생소함이 느껴졌고 기억 속에 남아 있던 푸른 나무들은 사라져버렸다. 대신 눈에 들어온 것은 2층 높이의 시멘트 건물들, 타일로 단장한 담장들,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들이었다. 아! 어쩌면 철근과 시멘트가 지금 이 시대의 표상인지도 모르겠다.


기억 속의 나무들은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무슨 연유로 나무들이 사라져버린 것일까? 중국 농촌을 발전시키는 데에 이러한 단계와 과정이 꼭 필요한 것인가? 생태농촌 건설은 그저 아름다운 중국의 꿈일 뿐이란 말인가! 내가 특히 걱정하는 것은 작금의 새로운 농촌 도시화(城?化) 사업과정에서 농촌의 밭이 더 퇴화되는 것은 아닌지, 더 많은 나무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환경이 더 악화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점들이다. 


2 _ 소실 원인: 마을사람들의 말


동풍현을 조사하면서 틈나는 대로 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전화인터뷰를 하기 시작했다. 인터뷰 대상은 내가 아는 사람들로 우리 어머니와 여동생, 이웃사람들도 포함되었다. 여동생은 이 문제로 자기 가게에 이웃사람들을 불러 모아 왜 나무를 심지 않게 되었는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첫 번째 의견은 채소를 심기위해 나무을 없앴다는 것이다. 원래 우리 마을에는 21개의 생산대가 있었는데 각 생산대마다 몇 십 무(畝)의 채소밭이 있어 기본적으로 마을사람들에게 사시사철 채소를 공급해 주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채소밭은 점점 주택지에 잠식당했고 농민들은 원래 안정적이고 풍부했던 채소밭을 잃게 되자 채소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나무 가격은 계속 하락했다. 작년 우리 어머니께서 뜰 안의 20년 된 참죽나무 세 그루를 팔아버리셨는데 세 그루 합쳐 겨우 800위안(元)을 받으셨다. 만일 채소를 팔았다면 한 가구당 일 년에 적어도 몇 백 위안은 벌었을 것이다. 그러니 중국 농촌의 이성적 계산능력을 과소평가할 것이 아니고 나무를 심을지 채소를 심을지는 아주 간단한 수학문제라는 것이다. 농민들의 말에 따르면 나무를 심는 것은 돈이 되지 않고 채소를 심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자연스럽게 나무 대신 채소를 심게 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 의견은 농촌의 정원 구조가 ‘도시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마을은 평지에 위치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가난하지는 않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가지런히 늘어선 2층 건물들과 타일로 단장한 담들이 이를 말해준다. 그런데 마당을 걷다보면 채소나 꽃을 심은 화단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전부 시멘트 바닥으로 변해버렸다. 정원의 시멘트화는 나무 심을 공간을 남겨두지 않았다. 농민들의 말에 따르면 시멘트 바닥이 더 깨끗하고 청소하기도 쉽고, 나무를 심으면 벌레도 생겨 이를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농촌 도시화과정에서 마을사람들에게는 콘크리트가 우선이었고 나무는 희생양이 되었다. 도농 간의 이분화와 농민의 도시생활에 대한 동경이 농촌의 전통 생활방식을 소멸시켰고, 도시생활은 농촌 공간을 더욱 잠식했던 것이다.


세 번째 의견은 나무의 용도가 갈수록 적어진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농민들이 집을 지을 때 지붕은 나무구조였고 그 위에 벽돌과 기와를 올렸다. 가구도 대부분 목수들이 집으로 와서 제작했다. 따라서 정원 안에 있는 나무들은 이 두 가지 용도의 주공급원이었다. 그러나 철근과 시멘트로 집을 짓기 시작하고 가구를 모두 외부에서 구입하게 됨에 따라 정원 안의 나무는 예전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작년, 건축업을 하는 친척에게 물어보니 현재 농촌에서 집짓는 데에 나무는 전혀 필요가 없고 전부 철근과 시멘트로 짓는다고 한다. 따라서 나무의 가격 하락은 곧 도태를 의미했고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타 의견들은 생략한다.


그러므로 나무는 농촌의 장기적인 실천 속에서, 농민들의 이성적인 계산 하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나무가 사라진 것은 시대의 변화를 반영했고 중국사회의 발전을 반영했던 것이다.

        

3 _ 생태농촌과 농촌 도시화 건설


최근 들어 고향의 환경은 눈에 띄게 변화했다. 비는 점점 적게 내리고 온도는 점점 상승하고 있다. 며칠 전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더니 고향의 기온이 섭씨 39-40도를 육박하고 낮에는 집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고 밤에는 잠을 못 주무신다는 것이었다. 기온의 상승과 나무의 감소, 이 양자가 분명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 최근 몇 년 사이 고향사람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각종 암에 걸렸고 이러한 현상은 보편적이면서도 저령화 되어가는 추세이다. 그렇다면 질병의 발생과 나무의 감소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기온의 변화와 암의 높은 발병률은 아마 환경의 악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무릉도원은 중국인의 마음속 이상향이다. 도연명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땅은 평평하니 넓고 집들은 반듯하게 늘어서 있으며, 비옥한 토지, 아름다운 연못, 그리고 뽕나무밭과 대나무밭도 있었다. 길은 사방으로 나 있고 여기저기서 닭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을 지나며 농사짓는 남녀의 옷차림은 딴 세상 사람들 같았고, 노인이나 아이나 모두 화목하고 즐거운 모습이었다.”1) 이와 같이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꽃을 꺾어들고 편안히 남산을 바라보는 것(采菊東?下, 悠然見南山),2) 그것이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갈망하던 생활이었다.


농촌 도시화(城?化)는 오늘날 중국의 발전을 논하는 데 중요한 주제이며, ‘도시(城市)’가 농촌의 미래 발전 형태로서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신농촌 건설 과정이 환경의 희생을 대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농촌의 생태환경이 지속될 수 있느냐는 것이 중국 농촌의 꿈과 농촌 도시화 사업의 주요한 부분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신농촌 건설과 도시화 발전 사업이 단순히 농민의 수입이 얼마나 증가했는지, 농민의 신분이 상승했는지, 또는 농민의 사회보장제도가 얼마나 개선되었는지 등과 같은 점에서만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농촌의 생태와 환경을 보존하는 것이다. 농촌의 도시화 과정은 한편으로는 자연을 근간으로 하고, 자연을 아름답게 여기고, 자연을 감상하며, 자연에 복종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사람들이 자연을 통해 마음을 정화하고 생명의 가치와 귀속에 대해 깨닫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농촌 도시화 사업이 농촌을 기존 도시처럼 만드는 것(城市化)이 되어서는 안 되며, 사람과 자연의 화목한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영원한 주제 위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http://www.cd-pa.com/bbs/thread-194903-1-1.html

http://www.shaanxijs.gov.cn/news/info/18081.shtml



1) 도연명(365-427)은 중국 위진남북조시대의 시인으로『귀거래사(歸去來辭)』,『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도화원기(桃花源記)』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본문에 인용된 것은 그가 쓴 산문『도화원기』중에 나오는 구절이다-역자


2) 도연명의 시『음주(飮酒)』중의 한 수이다.『음주』는 원래 총 20수로 구성되어 있는 모음시로, 전체를 한 번에 쓴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술을 마시며 즉흥적으로 쓴 것이다. 그중 ‘采菊東?下, 悠然見南山’은 인구에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으로 ‘마음의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역자.

* 본문에 사용된 인용부호는 모두 역자가 사용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