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자 _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 교수


중국인에게 중일전쟁은 승리의 전쟁이고 항일의 전쟁이지만, 8년 전쟁 기간을 일본의 침략과 중국의 저항의 역사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중일전쟁이 일본의 수탈과 폭력에 대항하여 승리한 항일 전쟁이라는 도식은 국가의 기억일 뿐이다. 애국과 저항, 매국과 협력이라는 국가주의적, 애국주의적, 도덕적인 판단을 비판하고 중일전쟁 시기 전체상의 이해를 위해서, 저항의 다른 한편에 있는 ‘협력’에 관한 연구가 필요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1)


중국학계의 연구가 항전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서구학계의 연구도 1990년대 이전에는 항전사에 집중되었다. 이런 점에서 중일전쟁 시기 왕징웨이(汪精衛)의 협력 정치에 대한 보일(John Hunter Boyle)의 저작은 당시 서구학계의 상황에서도 매우 예외적인 것이었다.2) 이스트만(Lloyd E. Eastman)은 기존 항전사 일변도의 연구를 비판하면서 전시 일반 민중 생활 차원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전시 중국 민중과 일본군 간의 각종 비무장 접촉을 묘사하면서, ‘항일’ 전쟁은 민중 특히, 대부분의 농민 개개인과는 무관한 전쟁이라고 하였다.3)


이스트만을 포함하여, 1990년대 이후 협력 연구의 공통점은 일본점령구의 대일 협력 경험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협력 연구자들은 지리적인 것 뿐 아니라 심리적인 것 모두를 포함하는 ‘회색 지대’의 존재를 강조하였다. 일본군의 점령으로 정치적 진공 상태가 계속되면서 지역의 각종 세력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생존과 세력 확장을 우선 목표로 하였다. 이들에게 항일 민족주의 혹은 국가의 관념은 차후의 문제였다. 전쟁 기간 대부분의 지역민에게 중요한 문제는 항일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민간종교결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국학계에서는 명청(明淸) 시대의 비밀결사가 왕조 권력과 대항하였던 적극적인 측면이 중화민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사라지고 ‘반동적’ 성향이 강화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 연유는 중일전쟁기 일본점령구의 종교적 비밀결사가 대부분 친일적 성향을 갖게 되면서, 일본과 ‘협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연유를 단순히 ‘반동적’ 성향으로만 해석하기는 어렵다. 이와 관련하여 중화민국 시기에 새롭게 만들어진 종교결사인 도원(道院)과 홍만자회(紅卍字會)의 활동은 주목할 만하다.


도원은 백련교(白蓮敎) 계통 종교결사의 전통을 이어받아 교리를 발전시킨 조직으로, 도원의 기구인 홍만자회는 자선 행위로 잘 알려져 있다. 일본점령구 난징(南京)에서 홍만자회는 학살로 인한 수많은 시신을 수습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는데, 그 뒤 홍만자회의 동향에 대해 브룩(Timothy Brook)은 난징의 사례를 다음과 같이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다.4) 일본군이 1937년 12월 난징을 무력 침공하면서 수많은 사상자와 막대한 재산 피해를 낳았다. 여기서 홍만자회는 거리에 널려진 시신을 매장하였다. 난징은 일본군이 상하이(上海) 이후 점령한 최대의 도시로, 장제스(蔣介石) 국민정부의 수도였다.


일본 특무 기관은 난징 점령 후 중국인 협력 기구를 조직하기 위해 자치위원회(自治委員會)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는데, 유일하게 활용할 수 있고 자발적이었던 홍만자회를 이용하였다. 난징 홍만자회 분회는 1922년에 설립되었는데, 장제스 난징 국민정부가 수립되기 이전부터 자선과 구제 활동을 하였고, 국민정부가 난징을 포기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선 단체로서 홍만자회는 일본군 점령자와 접촉하였다. 정계 밖에서 대중적 명망을 얻고 있었던 홍만자회 난징분회(南京分會) 회장 타오시산(陶錫三)은 일본군이 살인을 중단한다는 조건으로 자치위원회 회장을 수락하였다. 자치위원회 6명의 위원 중 황웨쉬안(黃月軒)은 홍만자회의 활동가였고, 5명의 고문 중 쉬촨인(許傳音)은 난징 홍만자회 부회장이었다. 다른 길이 불가능하다고 여겨 일본의 점령을 자발적으로 수용하고 친일 협력 조직에 참여한 것을 단순히 도덕적으로 판단하기 보다는 협력의 복잡함과 모호함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홍창회(紅槍會) 역시 중일전쟁기 협력과 관련하여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군벌 전쟁 등의 무정부 상태에서 토비(土匪)와 군벌의 수탈에서 지역사회를 지키기 위해 조직된 종교적 무장 결사인 홍창회는, 일본군의 점령으로 국민당군이 물러가자 자위를 목적으로 재건되었다. 일본군이 허난성(河南省) 쥔현(浚縣) 등을 점령하고 이 지역의 홍창회 곧 천문회(天門會) 등을 모집하자, 천문회는 일본군에 협력하는 대신 지방 치안을 담당하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로써 천문회는 일본군과 ‘협력’하는 동시에 천문회의 활동을 보장받고, 공산당, 국민당군과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전쟁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5)


세이볼트(Peter J. Seybolt)는 허난성(河南省) 네이황현(內黃縣) 사례 연구에서, 전시 국민당, 공산당, 일본군 등 세 세력에 속하지 않는 회색 지대의 지방 경험을 묘사하였다.6) 네이황현은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인구 20여 만 명의 척박하고 가난한 지역이었다. 전쟁 초기에 국민당 당국은 일본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도망하였다. 현의 민중이 창고를 약탈하고 교외의 토비가 현성(縣城)을 공격하자, 현의 엘리트는 민단(民團)을 조직하여 이를 막고 일본군과 결탁하여 괴뢰정권을 조직하였다. 부근의 홍창회 곧 성도회(聖道會)는 허난성 안에 잔류한 국민당 군대와 손을 잡고 엘리트층이 주도하는 민단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홍창회는 일본군에 투항하였고, 국민당 군대 역시 1940년에 일본군에 항복하고 ‘위군’(僞軍)으로 개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네이황현 일대에 남아있던 중국공산당 유격대만이 항일하면서 친일 무력집단과 투쟁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1개 소대에 불과하였고, 전쟁 8년 기간 동안 네이황현에서는 지역의 민단, 홍창회, 국민당군 등이 상호 충돌하면서 혼전이 계속되었다. 이들 세력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군과 합작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이러한 투쟁은 ‘전쟁 안의 전쟁’(war within a war) 곧, 권력 장악을 위한 내부 투쟁으로, ‘항일’보다 더 앞서는 것이었다.


1939년 12월 산둥(山東) 서남부 차오현(曹縣)의 홍창회 폭동도 홍창회측이 일본군과 협력하여 공산당군과 적대적 관계를 형성한 예에 속한다.7) 차오현은 허베이성(河北省) 남부, 허난성 북부, 산둥성 서남부 3성(省) 교계(交界)의 변구(邊區)에 속했다. 홍창회 폭동의 원인은 공산당의 항일 정책이 지주, 부농와 중농(中農)의 부담을 가중시켰기 때문이다. 1939년 11월에 일본군과 그 협력군 1만 여 명은 10여 일 동안 산둥 서남부 지구를 소탕하면서 큰 피해를 입혔는데, 주력 부대가 떠난 뒤에도 차오현 일대에 거점을 마련하였다. 공산당군이 홍창회 리더 안톈궈(安天國)을 체포하려 하자 안톈궈는 일본군에 투항한 뒤 일본군 및 그 협력자와 함께 항일 무장 세력을 공격하였다. 이후 안톈궈가 이끄는 홍창회는 친일 협력자로서 차오현 일대를 지배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은 8개월 뒤 공산당이 다시 차오현을 장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굿맨(David S. G. Goodman)의 산시성(山西省) 리청현(黎城縣) 이괘교(離卦敎) 결사의 반란에 관한 연구도 흥미로운 사례를 제공한다.8) 리청현은 중일전쟁기 공산당 근거지로, 진기로예(晉冀魯豫) 변구에 속했다. 리청현의 이괘교 결사는 1936년에 형성되었는데, 1940∼1941년 동안 두드러진 조직력을 보였다. 이괘교 결사는 지주, 부농과 중농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그 리더의 대부분은 부농과 지주였다. 또한 조직 규모면에서 리청현의 공산당 세력과 비교하여 크게 뒤지지 않았다. 


1941년에 발생한 이괘교 반란은 현지 공산당의 징세 정책을 포함한 사회경제적 개혁 조치에 대한 지주, 부농과 중농의 반발로 일어났다. 이 반란은 공산당의 지도력에 큰 타격을 준 ‘사악한 행동’(evil deed)으로 간주되었는데, 특히, 국민당군과 관련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 비난받았다. 그러나 이괘교 반란 이후 공산당은 징세 정책 등을 일부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차오현의 홍창회 폭동과 리청현의 이괘교 반란은 공산당의 사회경제적 개혁, 농민 민족주의 그리고 공산당의 조직력 등을 강조한 기존의 항전사 연구와는 다른 지역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http://www.saitamadouin.com/history.html




1) 이 글은 필자의 다음 논문을 웹진의 취지에 맞게 재구성한 것임. 이은자, 「중일전쟁기 일본점령구의 로컬 경험-대일 ‘협력’과 관련하여」, 『로컬리티 인문학』 10, 2013. 10.


2) John Hunter Boyle, China and Japan at War: 1937~1945: The Politics of Collaboration, Stanford, Cal.: Stanford University Press, 1972.


3) Lloyd E. Eastman, “Facets of an Ambivalent Relationship: Smuggling, Puppets, and Atrocities during the War, 1937~1945,” Akira Iriye(ed.), The Chinese and the Japanese: Essays in Political and Cultural Interactions(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0), pp.275~303.


4) Timothy Brook, Collaboration: Japanese Agents and Local Elites in Wartime China,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7(티모시 브룩 지음, 박영철 옮김, 『근대 중국의 친일 합작』, 한울, 2008).


5)  三谷孝, 『秘密結社與中國革命』,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2.


6) Peter J. Seybolt, “The War Within a War: A Case Study of a County on the North China Plain”,  David P. Barrett and Larry N. Shyu(ed.), Chinese Collaboration with Japan, 1932~1945: the Limits of Accommodation(Stanford, Calif.: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1), pp.201~225.


7) 馬場毅, 「山東抗日根據地と紅槍會」, 『近代中國華北民衆と紅槍會』, 東京: 汲古書院, 2001.


8) David S. G. Goodman, “The Licheng Rebellion of 1941: Class, Gender, and Leadership in the Sino-Japanese War”, Modern China, Vol.23, No.2, 1997, pp.216~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