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亞視角下의 蔣介石연구

배경한 _ 신라대학 사학과 교수


1992년 한중수교 이래로 한중간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교류는 계속하여 확대되어 왔고 그만큼 당대 중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 또한 계속하여 커가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중국근현대사에 대한 연구, 그 가운데서도 蔣介石 연구와 같은 중국근현대 정치사 내지 정치사상사에 대한 연구는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그 이유는, 모든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역사학을 비롯한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갈수록 저조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학계 내부에서도 경제사나 정치사와 같은 전통적인 연구 분야보다 문화사나 생활사와 같은 새로운 분야에 연구자들이 몰리고 있다는 데에 있다.


내가 蔣介石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던 1978년 무렵이었는데, 당시 한국 사회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말기로서 국민들의 정치적 참여가 극도로 제한당하고 독재적 강권 지배가 극성을 부리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나는, 대부분의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과 반대에 적극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니 蔣介石에 대한 나의 관심은 박정희와 마찬가지의 “독재적 군인정치가”로서의 蔣介石에 대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蔣介石에 대한 나의 관심은 학문적인 것이라기보다 현실적 정치적 관심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이를테면 아시아에서의 군사정권의 기원이나 그 지배구조에 대한 관심에서 蔣介石정권의 성립과정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나의 이러한 관심은 은사이신 민두기선생의 엄격한 학문적 훈련을 거치면서 많은 부분 수정되어, 이른바 혁명사관 내지는 국공 혹은 좌우 이념의 대립이라는 기존의 시각을 비판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장개석 정권의 역사적 실체를 연구 복원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에 따라 장개석에 대한 당초의 관심과 비교하여 연구의 결과는 상당히 달라진 모습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의 첫 번째 연구 성과로서 1995년에 출간된 《蔣介石硏究-국민혁명시기의 군사 정치적 대두과정》은1) 아시아 내지 중국의 군사정권의 성립과정을 살피겠다는 당초 문제의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蔣介石硏究》의 출간 이후 나의 관심은 조금 더 확대되어 민국 시기의 또 다른 정치 지도자들인 孫文과 汪精衛 등으로 옮아가긴 했으나 蔣介石에 대한 관심은 계속 되었다. 특히 2005년 스탠포드대학 후버연구소에서 《蔣介石日記》가 전격 개방되면서 나의 蔣介石에 대한 관심은 다시 한 번 불붙게 되었던 것이다. 2006년 여름부터 2007년 여름까지 1년의 안식년을 스탠포드대학에서 가지게 되었던 것은 전적으로 《蔣介石日記》를 보겠다는 생각에서였으며 그 결과로 2007년 이후 몇 편의 蔣介石 관련 논문들을 새롭게 쓸 수가 있었다.2)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친 시기에 이루어진 장개석에 관한 내 연구의 기본 시각과 비교하여 2000년대 중반 이후 내 연구의 시각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내 연구 시각의 변화는, 《蔣介石日記》의 개방 이후 중국과 臺灣 日本 등지에서의 蔣介石 연구 붐이 일어나면서 국제 학계에서도 기왕의 혁명사관 내지 국공 대립적 시각이 점차 없어지고 보다 실증적인 연구들이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고 하는 상황 변화와도 관련이 없지 않지만, 1992년 한중수교 이후,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 동아시아 내지 세계에서 중국의 위상이 급속하게 높아지면서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기본 틀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게 되었고 그에 대응하여 한국 학계의 중국사 내지 중국근현대사 연구의 관심이나 기본 시각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이래 한국 학계의 중국사연구에서 나타나고 있는 가장 커다란 시각 상의 변화라고 한다면 이른바 동아시각의 제기와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3) 중국사나 한국사, 일본사를 단독의 국가사, 곧 일국사로 보는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서 동아시아라는 보다 넓은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동아시각의 핵심적 내용이다. 주지하듯이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는 아시아 각국의 근대사는 모두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과 그에 대응한 반제민족해방운동을 하나의 공통된 조류로 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아시아 근현대사, 그 가운데서도 특히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근현대사는 각각의 일국사로 존재했다기보다는 한 개의 역사 공동체로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점이야말로 동아시아를 하나의 동일한 범주로 보고자 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동아시각이 가지는 내용과 장점, 혹은 범위와 관련하여 많은 논란이 뒤이어 일어났으며 현재도 진행 중이다. 한국에서의 동아시각은, 중한 간에 혹은 중일, 한일 간에 자주 일어나고 있는 역사분쟁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 것과 같은 민족주의적 역사 해석이 자칫 이웃 국가들과의 분쟁을 가져올 만큼 편협하고 주관적일 가능성이 크다는 반성에서부터 보다 객관적이고 광범한 이해를 통하여 평화적이고 호혜적인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수립하자고 하는 일종의 시민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이 점은 동아시각의 현실적 효용을 보여주는 측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객관성을 기반으로 하는 학문적 시각으로서 자리 잡는 데에는 여러 가지 걸림돌이 되고 있는 측면들도 있다.


동아시각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이전부터 “주변에서 보는 중국”이라는 시각4)에서 근현대 중국정치사를 연구해온 내게 있어서 동아시각이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물론 “주변”이 포함하는 지역적 범위나 주변이 가지는 구조나 성격의 문제를 둘러싸고 얼마간의 견해 차이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주변적 시각 자체 또한, 중국을 하나의 中心으로 상정하면서 차별적 존재로서의 주변을 상정하는 입장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내가 말하는 “주변시각”이라는 것도 동아시각과 마찬가지로 평등하고 호혜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달성을 공통의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동아시각은 내가 말해오던 주변 시각과 상당 부분 겹치거나 포괄하고 있는 셈이다.


동아시각 내지는 주변시각을 구체적으로 중국근현대 연구에 적용한 좋은 예로서는, 2011년 서울에서 열린 신해혁명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 속의 신해혁명(東亞史上的辛亥革命)”이라는 이름을 내건 이 학술대회의 조직을 맡았던 내가 학술대회의 주제 결정이나 발표자의 교섭 과정에서 가장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중국 일국이 아닌 동아시아 역사 가운데에서 신해혁명이 차지하는 의미를 주변의 관점에서 추구해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두 가지 점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첫째는 신해혁명이 아시아 내지 동아시아에서 공화제(넓게는 민주주의)의 수용 내지 확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측면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민족주의 혁명인 신해혁명의 결과로 청조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사라짐으로써 중국 주변의 약소민족들의 중국 지배로부터의 이탈 내지 독립 쟁취라고 하는 민족주의(넓게는 동아시아 민족 간의 호혜와 평등) 운동의 확산 내지 전개라는 측면에 관한 것이다. 한국 학자를 비롯하여 중국, 대만, 일본, 베트남, 몽골의 학자들이 참여한 이 학술대회를 통하여 “동아시아 역사에서 바라보는 신해혁명”의 의미가 “충분하게” 파악되었다고는 말할 수는 없겠으나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연구 시각이 20세기 초에 하나의 역사 공동체로 존재했다고 보이는 동아시아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이었다. 5)


동아시각, 혹은 주변시각에서 蔣介石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러면 어떤 연구내용과 연구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또 그것은 기왕의 장개석 연구와 비교하여 어떤 장점이 있겠는가? 아래에서는 세 가지 실제적인 예를 들어서 동아시각 하의 장개석 연구가 어떤 모양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지를 논의해보겠다.


첫째, 蔣介石의 정치 군사적 대두의 실질적인 기반이 되었던 황포군관학교의 창립은 연소용공을 골자로 하는 제일차국공합작의 가장 중요한 결과물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제일차국공합작은 1920년말 코민테른 대표로서 보이틴스키(G. Voitinsky)가 上海에 파견되어 오면서부터 모색되기 시작했고 이어서 마링(Maring)의 파견과 중국공산당의 창립, 국민당의 改進과 改組, 국민당 대표단(孫逸仙博士代表團)의 소련 방문, 소련의 군사 고문 파견과 재정 지원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제일차국공합작의 초기 진행과정에는 아시아 식민지 약소국에서의 공산혁명을 추진하기 위한 코민테른의 전략으로서 민족 식민지 문제에 대한 정책, 곧 연합전선 정책이 깔려 있었고 따라서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베트남, 일본 등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까닭에 장개석의 정치적 대두를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인 문제인 황포군교의 창립과정이나 운영과정, 황포군교를 중심으로 전개된 國共간의 대립과 갈등, 그러한 국공 좌우 대립에 대한 蔣介石의 대응문제와 中山艦事件의 발발과 그 해결과정 등을 연구하려고 할 때, 황포군교라고 하는 좁은 범위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공산주의 운동과 코민테른의 동아시아 정책 및 그에 대한 동아시아 각국 민족주의 운동세력의 대응, 동아시아 약소민족들의 민족운동과 황포군교의 관계 등을 함께 고려하는 보다 넓은 시각에서 이 문제에 접근한 필요가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동아시각 내지 주변시각 하의 황포군교 연구는 사료 상의 문제에 있어서도 중국뿐 아니라 소련, 일본, 한국, 베트남 등의 관련 사료들을 함께 구사할 필요성을 제기해 준다.


둘째, 1937년 7월 칠칠사변 이후 본격화된 중일전쟁의 진전은 일차적으로 중국의 항일전쟁이라고 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일본의 식민지 내지 점령지로 전락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각국들의 독립운동 내지 항일전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전쟁이 태평양 전역으로 확대된 이후 단계에 가게 되면 항일전쟁 자체가 제이차세계대전의 일부로 변하게 되고 따라서 중일전쟁에 관한 연구가 세계사적 시각을 요구하게 되지만, 그 경우에도 주된 전쟁터는 동아시아 지역이었다. 또 1942년 11월에 개최된 카이로회담 이후 중국은 비록 名目上이라고 하더라도 전쟁 처리를 위한 국제외교의 무대에서 강대국의 지위를 회복하게 됨으로써 전후 동아시아의 국제체제를 구상하고 협상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따라서 중일전쟁 시기의 蔣介石을 연구함에 있어서 동아시아 전체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카이로회담에서는 전후 한국의 독립을 원칙적으로 지지하는 결정을 했는데 여기에 蔣介石의 역할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카이로회담을 전후한 시기 蔣介石의 한국 문제에 대한 이해에는, 전후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중국 중심의 혹은 중국 우위의 (혹은 중화주의적) 입장이 들어 있었다고 하는 것이 나의 주장이지만, 비록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이 시기 蔣介石의 국제적 역할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국문제를 비롯한 동아시아와의 관련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관점이자 동아시각 내지 주변시각의 기본 관점이다.


셋째, 1949년 蔣介石 국민정부의 臺灣으로의 패퇴 직후 발발한 한국전쟁과 뒤이은 중국군의 한국 파병은 사실 상 臺灣 國民黨 정권의 존립을 가능하게 해준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음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대륙에서의 패퇴 직전인 1948년 蔣介石이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의 친미정권 수반 이승만과 일단의 회담을 열고 이른바 아시아반공연합의 결성을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과 한국전쟁 발발 이후 국민당 군대의 한국 파병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는 사실은 이 시기 蔣介石 연구에 있어서 중국과 한국, 대만, 미국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를테면 蔣介石의 대륙 패퇴와 한국전쟁의 발발, 진전은 이른바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냉전체제의 성립과정에서 드러난 일련의 사태들로서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 혹은 세계사의 진전과 맞물려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후기 蔣介石, 특히 臺灣에서의 장개석 지배체제의 정착과정에 관한 연구는 한국전쟁을 비롯한 같은 시기 동아시아 전체에서 진행된 냉전체제의 형성과 함께 연구되고 논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문제들은 모두 한국과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하여 동아시각 내지 주변시각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지만, 나는 이와 마찬가지의 문제 제기가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다른 국가 학자들에 의해서 훨씬 더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동아시아의 범위를 넘어서서 미국, 영국, 소련을 포함하는 보다 넓은 시각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술한 것처럼 蔣介石이 활동했던 20세기 초중기에 한 개의 역사공동체로 실재했다고 생각되는 동아시아를 범위로 하는 蔣介石 연구가 일차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에는 많은 연구자들의 공감이 있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동아시각 내지 주변시각 하의 장개석 연구는 기왕의 중국 일국 중심의 장개석 연구를 더욱 풍성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우리 동아시아인들로 하여금 “평화와 공존의 동아시아”로 나아가는 데에도 상당한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해본다.



1) 배경한, 『장개석연구』, 서울(일조각), 1995.

2) 배경한, 「蔣介石과 기독교-일기에 보이는 종교생활」, 『중국근현대사연구』41(2009) ; 배경한, 「중일전쟁시기 蔣介石 국민정부의 對韓政策」, 『역사학보』208(2010) ; 배경한, 「국민혁명시기의 蔣介石과 汪精衛」, 『동양사학연구』112(2010) 등 참조.

3) 白永瑞, 『思想東亞: 韓半島視覺的歷史與實踐』, 臺北(臺灣社會硏究雜誌社), 2009.

4) 裴京漢, 『從韓國看的中華民國史』, 北京(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4.

5) 이 학술대회의 성과는 최근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국제 학계의 다양한 비평과 의견을 기대한다. 배경한 편, 『동아시아 역사 속의 신해혁명』, 서울(한울),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