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方雜誌

 김지환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자 료 명 : 『東方雜誌』 共44卷 819期

편/저 자 : 商務印書館 編

출 판 사 : 商務印書館

출판년도 : 1904.03-1948.12

언    어 : 중국어(번체)





『東方雜誌』는 1904년(淸 光緖 30年) 3월 11일 上海의 商務印書館에 의해 창간된 종합적 성격의 잡지로서, 근대중국에서 가장 장구한 시기에 걸쳐 출판된 정기간행물이라 할 수 있다. 商務印書館은 1897년에 창건되어 중국근대출판업의 초석을 놓았으며, 전성기에는 전국에서 출판되는 서적의 6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세력이 매우 컸다. 『東方雜誌』는 신해혁명, 五四運動, 5·30사건, 상해사변, 만주사변, 중일전쟁, 국공내전 등 중국근현대사의 역정을 체험하며 일반 독자들에게 사건의 본질을 생생히 전함으로써 풍부한 사료성과 학술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창간시의 발간사에는 이 잡지의 목표를 ‘啓導國民, 聯絡東亞’(국민을 계도하고, 동아시아의 연대를 지향한다)로 설정하였으며, 이러한 취지에서 간행물의 명칭을 『東亞雜誌』로 정하였다. 그러나 당시 주상해 독일영사관이 발행하는 독문판 정간물의 명칭과 동일하다는 이유로, 張元濟1)의 건의에 따라 명칭을 『東方雜誌』로 변경하여 발행하게 되었다.


초창기 上海의 商務印書館


당초 『東方雜誌』는 月刊으로 발행되었으나, 1920년 1월 이후 半月刊으로 발행되다가 1947년 7월 다시 月刊으로 발행되었으며, 마침내 1948년 12월에 종간되었다. 창간에서 종간까지 장장 45년 동안 총 44권 816期를 발행하였으며, 여기에 발표된 문장이 총 22,442편, 삽화, 그림이 12,000여 편, 광고가 14,000편에 이른다. 잡지는 기사, 문장을 그 주제, 특성에 따라 사설, 諭旨2), 내무, 군사, 외교, 교육, 재정, 실업, 교통, 상무, 종교, 雜俎, 소설, 叢談, 新書月目 등의 전란을 개설하여 게재하였으며, 매월 25일에 발행되었다.


출판된 44卷 중 제4권 이전은 徐珂가 편집을 담당하였으며, 제5권 제7기부터 孟森, 陳仲逸(즉 杜亞泉), 錢智修, 胡愈之, 李聖五, 鄭允恭, 蘇繼? 등이 편집을 맡았다. 또한 梁啓超, 蔡元培, 嚴復, 魯迅, 陳獨秀 등 저명한 사상가, 작가들이 여기에 글을 발표하여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진원지가 되었다. 1910년 이미 독자들의 광범위한 환영을 받아 每期 판매부수가 1만 5천부를 넘어섰다. 『東方雜誌』는 ‘중국근현대사의 산 증인’, ‘중국근현대사의 자료보고’, ‘잡지계의 중진’, ‘잡지 중의 잡지’ 등의 별명으로도 불렸다.


1911년 신해혁명이 전개되면서 제8권 제1기부터 편집을 대대적으로 쇄신하여, 기존의 諭旨, 奏章 등 관방의 공용문서적 성격을 일소하고, 문학, 역사, 철학, 공업, 상업, 물리화학, 박물 등 현대학문의 분류체계에 따라 주제를 분류하고, 사회명사들의 원고를 널리 모집하였으며, 동서의 저명 학술저서를 소개하는 등 정간물의 학술성을 크게 강화하였다. 이를 통해 『東方雜誌』는 현대적인 종합적 성격의 잡지로 한걸음 발돋움할 수 있었다.


사설난에서는 각 시기의 중대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입장을 개진하였으며, 외교난에서는 주로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의 침략적 야심을 적시하고 제국주의 상호간의 쟁탈을 폭로하였다. 實業, 商務, 交通 등의 난에서는 주로 실업진흥, 상업과 철도권리의 회수, 광산권의 회수 등을 역설하였으며, 풍부한 통계수자 등 사료로서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雜俎에서는 中國事記, 日本事記, 歐美事記를 연재하였으며, 소설난에서는 미국이나 일본 등의 소설을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하였다.


창간시인 1904년은 러일전쟁이 발발할 무렵으로서, 『東方雜誌』는 논설을 중심으로 ‘聯日抗俄’(일본과 연대하여 러시아에 대항하자)의 주장과 입헌군주론을 드높이 제창하였다. 1915년 신문화운동과 1917년 러시아혁명이 발발한 이후 보수적 성격을 한층 강화하여 ‘東方文明’과 ‘君道’(왕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臣節’(신하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절개) 등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1919년 五四運動 이후 서양의 새로운 사조가 물밀듯이 들어오자 1920년 제17권 제1기부터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신사조를 적극 수용하고 소개하였다. 내용면에서도 과학기술 방면의 문장이 감소한 방면, 사회과학적 논저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특히 ‘世界新思潮’라는 난을 개설하여 시류의 변화를 소개하고, 독자논단도 개설하여 각종 학파의 학설 등 진보적 정론을 소개하였다. 1925년 5·30사건 당시에는 노동자들을 지지하고 학생들의 반제투쟁을 고취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동방논단 등을 개설하여 수많은 항일의 주장을 발표하였으며, 소련의 사회주의와 파시스트주의도 소개하였다. 1937년 7·7사변이 발발하자 사회의 명류들이 다투어 『東方雜誌』에 글을 발표하여 全民抗日을 역설하였다. 1937년 겨울 일본이 上海를 점령하자 『東方雜誌』는 본사를 長沙로, 다시 홍콩으로, 이후에는 중경으로 이전하였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 이후 1946년 본사를 다시 상해로 이전하였으며, 1948년에 종간되었다.


『東方雜誌』는 수차례 정간을 맞기도 하였다. 신해혁명이 발발한 1911년 11월-1912년 4월에 정간되었으며, 상해사변으로 말미암아 1932년 2월-10월 사이에 정간되었다. 1941년 12월-1943년 3월 사이에 일본이 홍콩을 침략하면서 『東方雜誌』는 일시 정간되었으며, 항전승리 이후인 1946년 10월-1947년 1월 上海로 본사를 이전하면서 일시 정간되었다.


1967년 7월 대만에서 王雲五를 발행인으로 『東方雜誌』가 복간되었으나, 1990년 6월에 다시 정간되었다. 1978년 臺灣의 大東圖書公司는 『東方雜誌』에 오랜 기간 동안 게재되었던 大事記 부분을 정리하여 『中華民國史事日誌:1912-1941』(臺灣 大東圖書公司 1978年版)를 출판하였으며, 중국 대륙에서도 三聯書店이 1957년에 『東方雜誌總目』을 출판하였다.




1) 張元濟(1867-1959). 청말 과거를 통해 진사에 합격하여 翰林院 庶吉士와 총리아문의 章京을 역임하였다. 1902년 상무인서관의 편역소 소장으로 입사하여, 경리, 감사, 동사장 등을 거쳐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上海文史館 館長과 상무인서관 동사장을 역임하였다. 1959년 8월 14일 上海에서 세상을 떠났다.


2) 황제가 신하와 백성에게 내리는 명령이나 지시를 가리키는 말로서, 청말 입헌파가 간행한 정간물은 공통적으로 이 난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