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로 보는 중국 (2)    「건국기념식(開國大典)」과 역사기술

| 기획 | 이미지로 보는 중국 (2)


저희 『중국 관행 웹진』에서는 2013년 1월부터 <이미지로 보는 중국> 칼럼을 기획하여 연재합니다. 인천대 HK사업단 및 소속 연구원들이 소장하고 있는 포스터, 사진, 그림 등의 각종 이미지 자료 중의 일부를 선정하여 설명과 함께 소개할 예정입니다. 다양한 이미지들에 내재되어 있는 풍부한 역사적 사실과 문화적 의미를 함께 읽어 나감으로써 중국 일상의 여러 단편을 새롭게 조명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건국기념식(開國大典)」과 역사 기술

안치영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주지하다시피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10월 1일 건국되었다.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대륙에서의 내전이 아직은 끝이 나지 않은 1949년 10월 1일 천안문광장에서 건국기념식을 거행하고, 마오쩌둥(毛澤東)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위 그림은 건국기념식을 형상화하여 둥시원(董希文)이 1953년에 그린 유화를 인민미술출판사에서 1963년에 인쇄한 것이다. 1963년 판본은 1955년 수정된 2판을 19차 인쇄한 것인데, 이때까지 모두 160여만 장이 인쇄되었다. 그런데 「건국기념식(開國大典)」으로 명명되어, 베이징의 혁명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그림의 운명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만큼이나 파란을 겪었다.


그림은 마오쩌둥이 천안문의 성루에서 천안문광장의 군중을 향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 정부가 수립되었다(中華人民共和國中央人民政府成立了)”고 선언하는 장면이다.1) 그림의 왼편인 마오쩌둥의 뒤쪽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한 지도자들이 천안문 성루에 도열해 있는 장면이다. 첫 번째 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인 주더(朱德), 류샤오치(劉少奇), 송칭링(宋慶齡), 리지션(李濟深), 장란(張瀾) 등 5명이 있다. 원래 판본에는 장란 옆에 까오강(高崗)이 있었지만, 이 판본에서는 지워지고 화분으로 바뀌었다. 주더의 뒤는 당시 정무원(政務院)2)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이며, 저우언라이의 뒤쪽은 중앙인민정부위원회 비서장 린보취(林伯渠)이다. 저우언라이와 주더 사이에 가려져 수염이 보이는 인물은 둥삐우(董必武)이며, 류샤오치와 송칭링 사이는 천슈통(陳叔通), 송칭링과 리지션 사이는 궈모뤄(郭末若)이다.


건국기념식 날 천안문 성루에 올라간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도자들의 구성은 1949년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이 혁명전쟁과 더불어 민주당파와의 연합의 산물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국가주석은 마오쩌둥이었지만, 국가 부주석은 공산당원인 주더, 류샤오치, 까오강 외에도 송칭링, 리지션, 장란 등 3인의 민주당파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산당의 절대적인 힘의 우위에서 출발한 민주당파와의 연합은 공산당의 필요와 정책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변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이후 사회경제적 전환이 이루어지고 공산당의 체제가 공고화됨에 따라 민주당파는 점차 정치적으로 배제되어 갔다. 그리고 그것의 정점이 1957년의 반우파투쟁이다. 반우파투쟁과 민주당파의 배제는 다행이도 그림의 운명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천안문 성루의 인물들은 반우파투쟁이나 이후 역사적 과정에서 핵심적 비판대상이 아닌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로부터 보호받는 원로였기 때문이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당파와는 전략적 연합으로 그 연합의 변동은 필연적인 역사적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건국기념식 날 천안문성루의 민주당파의 존재는 말 그대로 “역사”로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산당 내부에서 발생한 투쟁은 그렇지 못했다. 당내의 투쟁으로 발생한 반혁명?반당분자는 배신자와 적으로서 숙청되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역사에서 지워야할 수치였다. 그들 배신자들은 천안문성루에서 영광스러운 공화국의 탄생을 선언할 자격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중국공산당의 역사에서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건국기념일 그림에서도 지워졌다.


그림의 최초의 수정은 1955년에 이루어졌다. 그 전해에 발생한 까오강?랴오슈셔(饒漱石) 사건의 결과였다. 반당분자인 까오강을 역사에서 말살하기 위해 영광스러운 공화국건국의 자리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위의 그림은 이때 수정된 판본을 1963년에 인쇄한 것이다. 두 번째 수정은 문화대혁명 발생 후인 1968년에 이루어졌다. 문화대혁명시기 류샤오치는 당내의 제 1의 주자파(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당권파)일 뿐만 아니라 배신자이자 간첩으로 낙인찍혔다. 공산당에서 영원히 숙청된 류샤오치가 건국기념식에 참석했다는 사실은 지워져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류샤오치는 수염만 살짝 보이던 둥삐우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그림의 악운이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972년 린보취가 옌안(延安)시절 마오쩌둥과 장칭(江靑)의 결혼을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린보취를 삭제하려고 했다. 그런데 둥시원은 이미 암 말기였기 때문에 그림을 수정할 수 없었고(둥시원은 1973년 1월 사망했다), 대신 수정을 맡은 화가가 원작의 훼손을 우려하여 원본을 수정하지 않고, 린보취가 없는 복제본을 다시 그렸다. 이후 전시된 것은 새로운 수정판이었기 때문에 3번째 수정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원본은 불행 중 다행히도 수정을 면하였다.


1978년 11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원칙을 천명한 이후 혁명박물관에서는 원래의 모습을 복원하려고 했다. 그런데 둥시원의 유족들이 원작을 수정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래서 혁명박물관에서는 원본을 수정하지 않고 원래대로의 복제품을 만들었다. 현재 혁명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것은 이때 원래의 모습대로 복제한 복제품이며 원본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역사 해석은 늘 새롭게 이루어지지만 역사적 사실은 변화되지 않는다. 그림에서 지운다고 그 사람이 거기에 있었던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않는다. 그러나 권력자들은 역사를 고쳐 쓰면 마치 있었던 사실이 없어지는 것처럼 여기고, 역사기술에 개입하려는 유혹을 쉽게 떨쳐버리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장기적으로 결국 사필귀정한다. 그렇지만 왜곡된 역사는 당대의 상처일 뿐만 아니라 유화의 덧칠 흔적만큼이나 오랫동안 기억되고 기록된다. 역사는 과거의 전철을 되풀이 하지 말라는 교훈이지만 우둔함으로 인한 것인지 욕심으로 인한 것이지 늘 잘못이 반복된다. 중국의 「건국기념식」 그림의 운명에서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읽혀지는 듯하여 애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참고자료


艾中信, 「油畵『開國大典』的成功與蒙難」, 『董希文硏究文集』 文化藝術出版社, 2009.



1) 마오쩌둥이 이때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로부터 중국인민이 일어섰다!”고 선언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그 전날인 9월 30일 전국정치협상회의의 연설에 포함된 내용이다.


2) 정무원은 1954년 헌법제정 이후 국무원으로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