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滿洲’란 어떤 곳인가?*

윤휘탁 _ 한경대 교양학부


근대 이후 만주(국) 사회에서는 상술한 동아시아 각 민족(혹은 종족)들이 각축하는 가운데 이들 각 민족의 역사적 전통?문화?습속?생활 방식, 정치적 취향?의도, 사회 경제 관계, 민족 인식, 각 민족의 위상 등이 투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각 민족들의 출신 국가들도 만주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자민족의 사회적 존재 양태나 민족적 역학 관계 등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만주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각 민족들의 출신 국가들의 관심은 역사적으로 볼 때, 두 가지 양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즉 동아시아 각 국가들, 구체적으로 말하면 청조와 그 뒤를 이은 중화민국, 제정(帝政) 러시아와 그 뒤를 이은 소련, 일본 그리고 부분적으로 조선과 몽골인민공화국 사이의 이해관계가 상충되지 않았을 때, 만주 사회는 그들 각자의 인적?물적 교류 혹은 문화적 교류를 가능케 하는 동아시아의 ‘매개 지역’으로 기능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동아시아 각국(혹은 민족)들의 이해관계를 절충시켜 줄 수 있는 ‘완충 지대’로 작용하기도 했다. 반면에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 만주 사회는 그들 각자의 외교적 마찰 혹은 물리적 충돌의 ‘각축장’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후자의 경우처럼 동아시아 각 국가(혹은 민족)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동아시아 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변화의 출발점’은 바로 만주 사회였고, 그로 인해 만주 사회는 ‘동아시아 변동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증명된 바가 있다.


가령 전 근대 시기를 고찰해 볼 때, 북방의 유목 민족들(거란족, 여진족, 일부 몽골족, 만주족)의 흥기와 그에 수반된 왕조 건설은 바로 만주 사회를 기반으로 이루어졌고, 만주 사회를 동력으로 한 북방 유목 민족들의 흥기와 왕조 건설은 중국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여러 민족 국가들에게 엄청난 변화를 야기했다. 이때 만주, 특히 중국 제국과 접촉했던 남부 지역은 ‘저수지’ 기능을 했다. 만주 남부가 지닌 저수지로서의 물질적 특징과 자원은, 상술한 북방 유목 민족들이 중국 대륙을 차지하고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1)


중국 제국을 지배한 만주 지역의 특별한 자원은 여러 인자들로부터 나왔다. 만주 지역은 중국 내륙으로부터의 통제를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전근대 중국 제국의 군대가 광범위한 전쟁을 벌이고 지탱하기엔 너무 방대하고 다양한 지역이었다. 이 다양성은 서쪽의 몽골 유목민들, 산악, 삼림 속의 사냥 벌목꾼들, 남쪽의 중국인 농업 공동체, 동쪽의 조선인 미작(米作) 공동체 등 삶의 양식에도 나타났다. 만주는 다른 변경 문명권보다도 훨씬 더 혼성 문화를 유지하고 중국과 교류했다. 만주 지역의 성공한 지배 집단들은 중국 상품, 기술, 문화에 접근하여 이를 흡수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중국의 통제를 벗어난 채 자신들을 강화할 수 있었고, 적어도 부분적으로 이 자원들을 만주 내의 다양한 공동체들과 연합하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만주 지역은 중국을 통제하려고 했든 혹은 이미 통제했든 간에, 지배 집단들에게 필요한 자원을 마련해 주었다.2)


근현대를 고찰해 보아도 만주 사회는 ‘동아시아 변동의 시발점’이었음이 드러난다. 가령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 패권의 향방을 결정짓는 데에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역은 만주 지역이었다. 그 결과 만주 지역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주요한 전쟁터로 되었으며, 사실상 이들 전쟁의 진원지(震源地)와도 같은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국민혁명 시기 국민당이 북벌(北伐)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도 만주 지역에 기반을 둔 펑텐군벌(奉天軍閥)의 협조와 역량에서 기인되었다. 일본의 중국 침략(만주사변)도 만주에서 시작되었고 괴뢰 만주국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일본을 포함한 제국주의 국가들이 만주에 대한 연고성을 주장하게 된 데는, 만주가 개척지이자 한족과 무관한 원시적 무인(武人)들의 처녀지라는 역사적 이미지 때문이었다.3)


만주국의 출현은 만주를 둘러싼 중국?소련?일본 사이의 긴박한 긴장 상태를 깨뜨렸고 중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기존 질서를 흔든 동시에 중일전쟁의 리허설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동아시아 사회를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는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으로 몰아넣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또한 소련군의 대일(對日) 선전 포고와 만주 점령은 일본 제국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그 뒤를 이은 소련군의 북한 진주, 그리고 중국군의 한국전쟁 참여 등도 모두 만주에서 촉발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만주 수복과 만주의 온전한 중국 귀속은 한반도에서의 남북 분단 및 동아시아 냉전 체제의 고착을 야기했다.


결국 만주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중국의 온전한 영토로 귀결되기까지4) 동아시아 역사에서 독특한 지역적 특성을 지녀왔다. 우선 만주는 거란족이나 여진족, 몽골족 그리고 만주족이 웅비하기 위한 직접적인 혹은 부분적인 터전이었으며, 근대 제정 러시아(혹은 소련)가 동방으로 진출하거나 동아시아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문으로 작용했고, 해양 세력인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처럼 만주가 역사적으로 여러 민족들이나 국가들의 대륙 진출을 위한 직접적인 터전 혹은 매개적인 교두보로 작용할 때마다, 동아시아의 역사 지도 혹은 동아시아 각 민족이나 국가 사이의 역학 관계도 바뀌었다.5)


다음에 만주(국)는 중국 관내에 대해서는 빈민들의 ‘생명을 이어주는 젖줄’로서 혹은 청조 및 중화민국의 재정 부족을 해소하기 위한 ‘돌파구’로서 작용했다. 또한 만주(국)는 일본의 모순 해소를 위한 돌파구 내지 일본 사회 내 ‘찌꺼기들(?)의 배출구’로서 작용하기도 했다. 대량의 일본인 농업 이민자들은 일본 본국의 주변적인 존재들로서 만주국에서 새로운 삶의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했다.6) 이들 중에 빈궁의 밑바닥에 떨어져 고통 받다가 겨우 귀환한 사람들도 이전의 토지는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버려, 고향 마을로 돌아갈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이제는 다 갈아엎어버린 것으로 보이는 농지 가운데에서 겨우 남은 고랭지 원야에 다시 개척의 한 걸음을 내딛을 수밖에 없었다.7)


당시 만주(국)는 일본인들에게 ‘나락(奈落)’과 같은 어두운 이미지로 비쳐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처럼 ‘폐쇄된 공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도피처’ 혹은 ‘유사 망명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 결과 만주에서 살다 돌아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만주 낭인’이라는 칭호에서도 풍겨나듯이, 어느 정도의 차별이 행해졌다.8)


조선에서도 1910년 일본의 강제 합병을 계기로 의병 활동을 하다 쫓기거나 식민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대안을 찾아서, 조선총독부의 ‘자작농 창출(自作農創定)’이나 이민 정책에 편승해서, 혹은 일확천금을 꿈꾸며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건너갔다. 만주는 식민지 현실을 벗어나려는 조선인들에게 도피처로서 혹은 한반도에서 삶의 기반을 지니지 못했거나 일확천금을 꿈꾸던 사람들에게 ‘희망의 땅’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인 대다수는 정치적 이유나 경제적 이유로 조선에서의 삶의 뿌리가 뽑혀져나갔다. 그들은 만주로 이주할 때 조선에 재산이 없었거나 그나마 있는 재산마저 대부분 처분했기 때문에 설령 조선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천덕꾸러기’ 신세였을 뿐 조선에서 그들을 반갑게 맞아줄 사람은 거의 없었다.9)


더 나아가 만주는 유태인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에서 도망쳐온 회족(回族)에게도 일종의 도피처였다. 그리고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소련에서 탄압을 받다가 도망쳐온 백계(白系) 러시아인들에게도 만주국은 중요한 생활 근거지였으며 ‘구원의 공간’이었다.10) 당시 우랄산맥 동쪽 거주자들이 볼셰비키의 탄압에서 벗어나는 루트는 철도를 따라 시베리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거나 하얼빈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블라디보스토크는 이미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하얼빈으로 피난민들이 쇄도했다. 피난민 물결에는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11)


상술한 것처럼 ‘만주’는 전 근대, 특히 요?금?원?청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동아시아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한 ‘질서 변동의 진원지’이자 ‘동아시아 패권 쟁탈의 발판’과도 같은 곳이었다. 근대에 들어 만주는 여전히 제국주의 열강이 각축하면서 모순이 응결된 ‘동아시아 모순의 축소판’이자 “서구와 일본이 제국주의적 야심을 위해 주로 사용해온 근대적 창조물”12)로서 ‘초국적 현상(transnational phenomena)’13)을 띠기도 했다.


또한 지정학적?사회적 측면에서 보면, 만주는 근대 동아시아의 중국인?조선인?일본인?몽골인을 비롯하여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도피한 일부 서구인(러시아인?폴란드인?유태인 등)에게까지 “이산(離散), 정착, 유리(遊離), 탈출, 방황으로 점철된, 무수한 정체성이 형성되고 경험되어왔던 역사적?현재적 장소”14)이기도 했다. 또한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만주는 동아시아 각국으로부터 가난, 수탈, 각종 재해 등으로 이산한 백성에게 ‘삶의 안식처이자 돌파구’로 작용하기도 했다. 특히 도시 공간은 식민지 조선?대만 출신자들에게 입신출세나 일확천금의 기회를 부여잡을 수 있는 ‘동양의 엘도라도’이기도 했다.15)




* 이글은 2013년 2월 출간 예정인 『만주국: 식민지적 상상이 잉태한 복합민족국가』(혜안)에 수록된 내용의 일부이다.

1) Owen Lattimore, Manchuria: Cradle of Conflict, New York: Macmillan, 1935, pp.39~42.

2) Prasenjit Duara, Sovereignty and Authenticity: Manchukuo and the East Asian Modern,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Inc, 2003; 프래신짓트 두아라 지음, 한석정 옮김, 『주권과 순수성: 만주국과 동아시아적 근대』(나남, 2008), 97쪽.

3) 앞의 책, 『주권과 순수성: 만주국과 동아시아적 근대』, 107쪽.

4) 중국에서는 “만주족, 몽골인 등이 오늘날 ‘중국 민족’에 흡수되었으므로 만주 지역은 매우 오랫동안 중국인들이 거주한 곳이라 할 수 있다.”고 하여 만주에 대한 역사적 귀속성을 주장한다(Soren Clausen and Stig Thorgersen, The Making of a Chinese City: History and Histiriography in Harbin, New York: Sharpe, 1996, p.9).

5) 예를 들면 요(遼)나 금(金)의 등장으로 북송(北宋)은 위축되었거나 멸망했고, 만주의 일정 부분을 지역 기반으로 삼아 성장한 원(元)에 의해 남송(南宋)마저 멸망했다. 이 과정에서 고려 역시 거란족?여진족?몽골족?만주족으로부터 수차례 침략을 받아 위기에 직면했거나 왕조의 사직(社稷)이 유린당하기까지 했다. 해양 세력인 일본 역시 대륙 세력인 원의 침략을 받으면서 존망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6) 일본인 농업 이민자들은 대부분 농업 종사자였고 학력이 낮았으며 일본 사회에서 낮은 계층에 속했다.

7) 오카베 마키오(岡部牧夫) 지음, 『滿洲國』(講談社 學術文庫, 2007); 최혜주 옮김,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 제국 일본의 교두보』(어문학사, 2009), 14쪽.

8) 山室信一, 「滿洲?滿洲國をいかに捉えるべきか」(앞의 잡지, 『環』 2002年 10月號), pp.47~48.

9) 尹輝鐸, 「‘滿洲國’의 2等國(公)民, 그 實像과 虛像」(『歷史學報』 169집, 2001.3), 139~172쪽.

10) 앞의 글, 「滿洲?滿洲國をいかに捉えるべきか」, p.51.

11) ヤン?ソレッキ-, 「ユダヤ人,白系ロシア人にとっての滿洲」(앞의 잡지, 『環』 2002年 10月號), p.102.

12) Owen Lattimore, Manchuria: Cradle of Conflict, New York: The Macmillan Co., 1932, p.7.

13) Prasenjit Duara, “Transnationalism and the Predicament of Sovereignty: China, 1900~1945”, American Historical Review vol. 102 no. 4, 1997, p.1043.

14) 김경일?윤휘탁?이동진?임성모 공저, 『동아시아의 민족이산과 도시: 20세기 전반 만주의 조선인』(역사비평사, 2004), 17쪽.

15) 임성모, 「제4장 하얼빈의 조선인 사회」, 위의 책, 『동아시아의 민족이산과 도시』, 2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