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중국의 전통 먹거리    유탸오와 만터우

이야기가 있는 중국의 먹거리 - 유탸오(油條)와 만터우(饅頭)*

란샹(藍翔)ㆍ펑이여우(馮懿有) 씀

허혜윤 _ 인천대학교 HK연구교수 옮김

 

중국의 요리나 음식은 가장 중요한 전통문화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유명한 요리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들도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중국어를 배워본 사람들은 밤 워터우(窩頭, 옥수수 가루나 수수가루 따위의 잡곡 가루를 원뿔 모양으로 빚어서 찐 음식인데 밤 워터우는 밤으로 만든 것임)의 유래에 대하여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의화단사건(1900년) 때 서태후의 피난에서 유래한 밤 워터우는 우리의 도루묵과 유사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중국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아침 식사로 두유와 함께 먹는 유탸오(油條)와 북방 중국인들의 주식의 하나인 ‘큰 만터우(大饅頭)’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에서 유래하고 있다.


1 _ 유탸오(油條)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상해에는 유탸오가 없었고, 남송(南宋)시대 임안(臨安, 지금의 항주)에서 상해로 전해졌다고 한다.


남송 소흥(紹興) 8년(1138년), 서호(西湖)에서 멀지 않은 임안의 한 길거리에 간식가게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간식가게에서 ‘사람 튀김’을 팔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러 왔다. 하지만 그들이 본 것은 갓 튀겨낸 기다란 밀가루 튀김뿐이었다. 밀가루 튀김 한쪽은 남자처럼 생겼고 다른 한 쪽은 여자처럼 생겼는데, 뱀처럼 생긴 남자와 여자가 함께 꽈배기 모양으로 단단히 감겨있었다.


당시 남송 고종(高宗) 조구(趙構)의 정치는 부패로 얼룩져 있었고, 간신 진회(秦檜)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금나라에 대항해 싸운 명장 악비(岳飛)를 모함해 풍파정(風波亭)에서 처형시켰다. 간신이 악비를 모함해 죽였다는 소식이 항주에 퍼졌을 때, 백성들은 모두 이를 갈며 진회를 찢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다. 그러나 진회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백성들은 감히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이 때 왕소이(王小二)는 좋은 방법을 생각했다. 그는 먼저 밀가루 반죽으로 진회를 만들고, 또 그의 악처 왕씨를 반죽한 다음 두 반죽의 등을 붙여 비틀어 기름 솥에 넣어 튀겨 내 마음속의 분노를 쏟아냈다.


그날 저녁 어떤 사람이 문을 두드려 왕소이가 문을 여니 흰 수염의 노인이었다. 노인은 집으로 들어와 서둘러 왕소이에게 예를 갖추고는 ‘당신이 간신 진회와 왕씨를 반죽했다는 것을 성안의 모든 백성들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 늙은이가 백성들을 대표해 당신에게 경의를 표하러 왔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진회와 용기만이 아니라 지혜도 겨루어야 합니다. 내일 당신이 밀가루 반죽을 사람 모양으로 빚지 않고, 밀가루 반죽 2개를 잘라 비틀어 튀겨도 백성들은 마음속으로 진회와 왕씨를 같이 기름 솥에 넣은 것이라 생각할 겁니다. 이렇게 해야 진회가 보복을 하려 해도 증거가 없어질 테니 손을 못 쓸 것입니다. 또 새로운 음식을 ‘유작회(油炸?, 유작(油炸)은 기름에 튀기는 요리법이고, 회(?)는 물에 끓이는 요리법인데 회(?)는 진회(秦檜)의 회(檜)와 발음이 같음)라 불러도 백성들은 이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유작회’를 한 달여쯤 판매했을 때, 관병 두 명이 왕소이의 가게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들은 왕소이가 ‘유작회’를 판다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심문하려 했다. 왕소이는 관병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유작귀(油炸鬼) 팔아요!’라고 말을 바꿔 소리쳐서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백성들은 ‘유작회’라 부르든 ‘유작귀’라 부르든 간신 진회부부를 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35년 10월16일 주작인(周作人)선생은 ≪우주풍(宇宙風)≫에 ‘담유작귀(談油炸鬼)’란 글을 발표했다. 그 후 다시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니, 어둑한 것이 곧 눈이라도 내릴 것 같구나. 유탸오 하나를 사와 죽과 같이 먹는데, 짠 기가 없어 아쉽구나.’라고 썼다.


이 시로 봤을 때 유탸오는 역시 반찬이었다. 상하이 사람들은 아침에 죽과, 물에 만 밥을 즐겨 먹었는데, 유탸오 두 개를 사서 반찬처럼 간장에 찍어 죽과 함께 먹었다. 다빙, 유탸오, 콩국, 찹쌀경단 중 유탸오가 가장 중요한 음식이었다. 다빙, 찹쌀경단을 유탸오에 싸서 먹어야 향긋하고도 바삭한 식감을 느낄 수 있고, 짠 소스와 먹든 달콤한 소스와 먹든 모두 유탸오와 함께 먹었다.


2 _ 큰 만터우(大饅頭)


‘만터우(饅頭)’라는 밀가루 음식에 어떻게 ‘머리(頭)’라는 글자가 붙어있을까?


전하는 바에 따르면 삼국시대 때 제갈량(諸葛亮)이 맹획(孟獲)을 잡으려 노수(爐水)를 건너려고 할 때 산과 강에 독기가 만연하여 강을 건너면 병사들이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는 귀신의 장난이므로 사람의 머리로 제사를 지내야 안전하다고 하였다. 제갈량은 차마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없었지만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도 없었기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묘책을 생각해냈다. 그는 밀가루 반죽을 사람 머리모양으로 만들어 소와 양의 고기를 다져 넣고는 이를 쪄낸 후 사람의 머리 대신 물속에 던져 넣었다. 이때부터 ‘만터우’라는 이름이 생겼다.


당시에는 만터우의 ‘만(饅)’자를 ‘만(蠻)’으로 썼다. 만(蠻)은 옛날 남방의 소수민족을 비하해 부르던 말이었다. 제갈량이 정복한 남방지역은 바로 ‘남만(南蠻)’으로, 당시 사람 머리를 바쳐야 한다고 말했던 사람들의 주인도 만인(蠻人)의 우두머리로, ‘만터우(蠻頭)’라 불렀다. 이 만터우(蠻頭)가 중원의 음식으로 발전했을 때 만터우를 먹는 사람들은 만인의 우두머리를 먹는다고 생각해 너무 야만적이라 이를 삼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몇몇 문인들이 이를 만터우(饅頭)라 고쳐 불렀다. 서진(西晉)의 ≪속광미집(束廣微集)ㆍ병부(餠賦)≫에 ‘음력 3월 무렵, 음양이 교차하고 한기가 사그라들며 따뜻하나 덥지는 않은 이때에 연회에 적당한 음식은 만터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漢)ㆍ위(魏) 시기, 밀가루 음식은 많았지만 모두 발효를 시키지 않았다. 그 후 오랜 연구를 거쳐서 점점 효모균의 생화학 반응을 파악하게 되면서 발효시킨 밀가루 음식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남제서(南齊書)≫에 서진 영평(永平) 9년 (299년), 태묘(太廟)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이는 음식 중 ‘면기병(面起餠)’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나라 사람인 정대창(程大昌)도 ≪연번로(演繁露)≫에 ‘발효된 밀가루는 부드러워진다’고 썼다. 이런 발효시킨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면기병’이 바로 오늘날의 만터우다.


만터우의 가장 큰 변화는 속을 넣은 ‘만터우’다. 만터우는 발효시킨 밀가루로 만들어 찌고 나면 더 커진다. 속을 넣지 않은 것을 북방에서는 만터우라 부르고 속을 넣은 것은 ‘바오쯔(包子)’라 부른다. 상해 사람들은 야채 만터우, 고기 만터우, 새우 만터우, 군 만터우처럼 속을 넣은 바오쯔를 여전히 만터우라고 부르는 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예전에는 상해에서 만터우가게를 여는 사람들은 대부분 산동 사람이었는데 상해 사람들은 속을 넣지 않은 만터우를 좋아하지 않고 속을 넣은 ‘만터우’를 좋아했다. 그래서 지금 상해에서는 속을 넣지 않은 진짜 만터우를 사기가 힘들다.


* ‘藍翔ㆍ馮懿有, 2005, ≪圖說360行≫, 臺北: 三言社’에서 발췌번역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