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중국의 상인 (11)    하동푸저우(河東浦州)의 장가(張家)와 왕가(王家)

옌훙중(燕紅忠)ㆍ류청후(劉成虎) _ 중국 산시대학 진상학연구소 씀

김지환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옮김


산시성(山西省) 염상(鹽商)의 명망세족 가운데 가장 유명한 가문으로는 명대(明代)에 대관료를 지낸 장쓰웨이(張四維), 왕충구(王崇古)의 집안을 들 수 있다. 장쓰웨이는 산시성 푸저우(浦州)인으로, 가정32년(1553년)에 진사에 올랐으며, 만력3년(1575년)에 이부상서 동각대학사의 신분으로 機務에 참여했다. 장쓰웨이의 부친 장윈링(張允齡)과 숙부 장샤링(張遐齡)은 모두 천하에 큰 족적을 남긴 이름난 상인으로서, 재산이 수십 만 량에서 백 만 량에 달하였다. 왕충구는 자가 학보(學甫)로서, 장쓰웨이와 같은 산서 푸저우인이었다. 가정20년에 진사에 올라 병부상서와 宣大總督1)을 역임했으며, 그의 동생은 북쪽 변경 방위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던 염상이었다. 그의 누이가 푸저우의 장윈링에게 시집가 자식을 일곱 두었는데, 그 중 두 아이가 요절하였고 맏이가 장쓰웨이였으며 둘째 아들이 장쓰돤(四端)으로서 后軍都督府 都事에 올랐다. 셋째 아들은 장쓰쟈오(四敎)였는데 그는 상인으로서 일찍이 龍虎衛指揮僉事에 올랐다. 넷째 아들은 장쓰스(四事)로서 州學生을 지냈으며 다섯째 아들 장쓰샹(四象)은 국자감생에 올랐다. 왕충구의 부친인 왕야오(王瑤)도 후베이(湖北), 샹양(襄陽), 산시(陝西), 하남(河南) 루산(魯山), 깐수(甘?) 장예(張掖), 쥬촨(酒泉) 등의 지역에서 장사를 하여 밑천을 모은 이후, 화이저(淮浙)에서 소금 거래에 종사하였다. 장과 왕 두 집안과 그 인척들은 대부분 염상이었으며, 장쓰웨이는 벼슬이 내각대신에까지 올랐으며, 왕충구는 변강대리의 지위에 올랐으니, 이들 집안은 막대한 재력과 세도를 동시에 지닌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1 _ 푸저우(浦州) 장(張)가


장가는 상인으로 출발하였지만 이후 관직과 상업 두 방면 모두에서 명성을 떨쳤던 가문이었다. 장씨의 선대는 원래 졔저우(解州)의 염장 남쪽에 거주하였는데, 원나라 시절에 장쓰청(張思誠)이 전란을 피해 푸저우(浦州)2)로 거처를 옮겼으며, 그 아들인 장유즈(張友直)가 마침내 본적을 화팡(化坊)으로 옮긴 것이다. 그는 중헝(仲亨)을 낳았으며, 중헝은 커량(克亮)을, 커량은 시우(琇)를, 시우는 닝(寧)을, 닝은 이(誼)를, 이는 윈링과 샤링을 낳았다. 장윈링의 조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조모인 레이(雷)씨가 재가하지 않고 수절하였다. 윈링이 어렸을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윈링의 모친 졔(解)씨는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자식을 돌보며 집안을 꾸려 나갔다. 그리하여 장윈링은 일찍부터 집안 살림을 맡아 처리하였으며, 이러한 까닭에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먼 지방으로 나아가 장사를 하게 된 것이다. 서쪽으로는 가오란(?蘭)3), 하오먼(浩?)4)을 건너 장예(張掖), 쥬촨(酒泉) 등 지방으로 가 물건을 팔았으며, 다시 몇 년 이후에는 남쪽으로 화이허(淮河)와 쓰수이(泗水)5)를 건너 오(吳)6)로 진출하였다. 이후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 서쪽으로 쿠이샤(夔峽)로 진출하여 초(楚)7)와 촉(蜀)8) 사이를 오가며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이후 다시 북쪽으로 창보(滄博)에까지 이르러는 등 도처에 족적을 남겼다.


장윈링은 비록 장사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오히려 신의를 중시하였다. 그가 이르는 곳마다 당지의 상인들은 그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매사에 일을 처리함에 항상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마다 경탄해 마지않았으니, 매사 철두철미함에 기이함을 느낄 정도였다. 장윈링은 자제를 교육할 때도 항상 엄격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맏아들 장쓰웨이가 과거에 급제하여 京官에 임명된 이후 윈링은 경사에 상주하며 항상 이르기를 “우리 조모와 모친께서 온갖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절개를 지킴으로써 하늘을 감동시켜 그 은덕이 자식대에 미치게 된 것”이라 하여 아들이 출세한 것을 모두 전대의 은덕으로 여겼다. 장윈링은 일생을 근면 성실하게 살았으며 비록 가산이 불어나더라도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50여 세가 되어서도 여전히 총명함에 변함이 없었다. 나이가 들어 고향으로 돌아가 포주성 동쪽 10리 지점에 위치한 멍멍챠오(孟盟橋)에 별장을 짓고 밭을 일구어 온갖 꽃을 심으니 사계절 끊임없이 꽃이 피고 졌다.


윈링의 동생 샤링은 결혼한 이후에 비로소 오(吳)와 월(越)9) 사이를 오가며 장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혈기 왕성하고 경험이 없던 그는 장사로 그다지 이문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는 남쪽으로 우링(五嶺)10)을 거쳐 광저우(廣州)에 도달하여 난창(南昌), 난징(南京) 등 여러 도시를 왕래하며 장사를 하였으나, 6, 7년이 지나자 밑천이 드러나 돈을 모두 탕진하고 빈털터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집에 돌아오자 모친은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모친은 임종 전에 장윈링에게 유언으로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네 동생이 자립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가 염려스러울 뿐이구나”라는 말을 남겼다. 윈링은 모친의 당부를 마음 속 깊이 새겨 동생 장샤링을 극진히 돌봐 우애가 각별하였으며, 장샤링 역시 형을 따르고 섬겼다. 샤링은 성품이 솔직 담백하였으며, 장사를 하였지만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자질구레한 것을 따지기 싫어하였다.


장윈링의 넷째 아들 쓰웨이(1526-1585년)는 가정32년(1553년) 진사에 올라 編修, 翰林學士, 吏部侍郞 등을 역임하였다. 몽고(蒙古)의 알탄(俺答, 1507-1582년)이 명나라와 시장을 개설하는 문제로 교섭할 당시 쓰웨이는 왕충구와 함께 대학사 가오공(高拱), 장쥐정(張居正) 등과 함께 시장의 개설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장쓰웨이의 집안은 장사로 재산을 모은 가문으로서, 장쥐정이 국정을 맡아 다스릴 때 그와 교왕하며 설이나 명절 때에도 항상 함께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만력3년(1575년)에 이르러 장윈링은 마침내 장쥐정의 추천으로 예부상서 겸 동각대학사의 자격으로 機務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만력10년(1582년) 장쥐정이 세상을 떠나자 장쓰웨이는 마침내 內閣首輔의 자리에 올랐다.


장쓰웨이의 동생 장쓰쟈오(張四敎)는 16세에 이미 먼 곳으로 나아가 장사를 시작하였다. 그는 ?泗를 거쳐 江淮에 이르렀으며, 남쪽으로는 구쑤(姑蘇), 우싱(吳興)의 경계 지역에까지 가 장사를 하였는데, 거래를 할 때마다 늘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 넘곤 하였다.


그는 부친을 따라 창루(長蘆)에서 염업을 경영할 당시부터 이미 견식과 도량이 넓고 계산도 치밀하였으며, 자질구레한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장쓰웨이는 과거에 급제하여 경관으로 부임한 이후 자신의 부친을 경사로 불러 거주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부친은 장사와 관련된 모든 지식을 장쓰쟈오에게 전해 주었다. 장쓰쟈오는 장사에 몸담은 시간이 오래되어 염무의 분포, 업무의 관리 및 배치 등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으며, 이후 경영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 총 자산이 무려 열 배를 넘어 섰다. 장쓰쟈오는 생각이 활달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며, 하고자 하는 뜻이 있으면 천만금을 주고서라도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성품으로 마침내 거금을 기부하여 龍虎衛指揮僉事의 자리에 올랐다.


장가 집안은 주로 상인이나 환관 집안과 사돈관계를 맺었다. 장윈링의 처는 왕씨로서 병부상서, 선대총독 왕충구의 누이이다. 장쓰웨이의 조고모부인 심정진(沈廷珍)도 장거리 무역을 하는 대상인이었다. 장쓰웨이의 둘째 동생 장쓰돤(張四端)의 처 李씨의 조부 리지쩡(李季曾) 역시 옌저우(?州)11)와 위(豫)12) 지역을 오가며 장사하는 상인 출신이었다. 장쓰웨이의 다섯째 동생 쓰샹(四象)의 처 왕(王)씨의 증조부 왕빈(王賓) 역시 상인이었다. 왕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쓰샹은 후처로 판(范)씨를 맞았는데, 판씨의 조부인 판스퀘이(范世逵) 역시 유명한 염상이었다. 장쓰웨이는 슬하에 쟈정(甲征)과 딩정(定征) 두 아들을 두었는데, 딩정은 일찍이 병부상서를 지낸 양푸(楊溥)의 손녀를 아내로 맞았다. 장쓰웨이의 딸은 내각대신 마쯔챵(馬自强)의 아들인 마준(馬諄)과 결혼하였다. 마쯔챵의 동생 마쯔슈(馬自修)는 “유학 공부를 그만 두고 부(?)13), 연(延), 상(商), 락(洛) 등지에서 곡식을 거래하던” 섬서의 대상인이었다.


2 _ 푸저우(浦州) 왕(王)가


왕씨는 장쓰웨이 집안과 혼인으로 맺어진 포주 관상의 대호이다. 왕씨는 명대 초기 펀양(汾陽)으로부터 푸저우로 이주해 와 정착하게 되었으며, 선조는 왕충원(王?文), 왕옌춘(王彦純), 왕빙신(王秉信), 왕징옌(王景嚴), 왕룽(王榮)으로부터 왕신(王馨)에 이른다. 왕신은 벼슬이 등주학정(登州學正)에 이르렀으며, 그 아들 왕야오(王?)는 상인이었다. 한방치(韓邦奇)의 『苑洛集』제5권에는 “公浦善士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 상업을 선택하였으나, 재물을 모으는 데에도 법도가 있었으며, 행상을 하면서도 의로움을 추구하였으며, 상품을 나르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라고 기록하였다. 명대 홍치 연간(1488-1505년) 그 아비가 등주학정으로 부임했을 당시 왕야오는 등(鄧), 유(裕), 양(襄), 섬(陝) 지역 간의 무역에 종사하여 점차 자본을 축적하고 있었다. 정덕 연간(1506-1521년) 그는 장예(張掖), 쥬촨(酒泉) 등의 지역에서 상업거래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이후 다시 회(淮), 절(浙), 소(蘇), 호(湖) 사이를 오가며 식염을 판매하였다. 이렇게 몇 년이 흐르는 사이에 그는 막대한 자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왕야오의 형 왕셴(王現)은 자가 원셴(文顯), 호는 이안쯔(噫庵子)였으며, 그 역시 대상인이었다. 왕원셴은 소시적부터 총명하고 배움을 좋아하였으나 팔고문(八股文)14)에 흥미를 갖지 못하여 여러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이후 벼슬에 대한 뜻을 접고 장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비록 그가 과거에는 합격하지 못하였지만 상업과 관련된 지식에 대해서는 한번 배우면 관련된 사항을 모조리 이해하였으며, 눈으로 한번 쳐다만 봐도 의미가 통하였다. 그는 최초 산서에서 장사를 시작하였으나 이후 다시 서역, 사천 및 강남 각지로 가서 상업 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리하여 상호를 속속 설립하여 이를 통해 재부가 끊임없이 흘러 들어왔으며, 따라서 엄청난 재산을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왕원셴이 장사의 길에 들어선지 40여 년 동안 온갖 상품을 거래하였는데, “서쪽으로는 타오롱(??)에 이르렀으며, 위장예(逾張掖), 뚠황(敦煌), 쥬위한(究玉寒), 리진성(歷金城)을 넘어 파촉(巴蜀)15)에 들어갔으며, 장강을 따라 吳越로 내려와 다시 펀진(汾晉)을 거쳐 쥬위엔(九原)에 도달하였으며, 쥬하(九河)를 넘어 장로(長蘆) 지역을 선회하였으니” 그야말로 온 천하에 자신의 족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명대 문학가 리멍양(李夢陽)이 지은 『空心集』 44권은 <明 故王文顯 墓誌銘>이라는 제목으로 묘비명에 새겨진 왕원셴의 일생과 40여 년에 걸쳐 그가 받들어 온 상도정신을 수록하고 있다. 즉 “왕문현은 상업을 경영하면서 이해타산에 뛰어났고 시세의 등락을 잘 파악하여 장사가 늘 번창하였다. 다른 사람과 교왕할 때에는 신의를 중시하여 아무리 적은 이익이라도 서로 나누었으니 이러한 이유에서 사람들은 자본을 기꺼이 투자하였다. 또한 시세 판단이 뛰어나 평생토록 곤경에 빠진 적이 없었다.” 이상의 짧은 문장을 통해서 우리는 왕원셴이 상업을 경영하면서 견지했던 두 가지 주요한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즉 첫째, 철저한 계획성을 갖추고 이익이 나면 아무리 적더라도 나누었으며, 사람들을 너그럽게 응대하였으며, 신의를 매우 중시했다는 점이다. 둘째, 치열한 상업 경쟁 속에서 시장의 수요 변화의 법칙을 파악하는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철두철미한 계산력과 시세의 변화를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천지자연의 변화를 이해함으로써 작황의 좋고 나쁨을 예측하고, 이를 통해 다시 상품 가격의 등락 추세를 예견함으로써 적시에 매매를 추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왕원셴의 상업 도리는 비단 유가의 윤리도덕을 체현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고대 장사꾼들의 장점 가운데 스스로에게 유용한 것이라면 적극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왕원셴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건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건 대단한 재능을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왕원셴은 선한 일에는 반드시 보답이 따른다는 소박하고도 낙관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고 정당하게 상업 활동에 종사하는 상인이라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기 마련이며, 하늘의 도움이 있어 가업도 반드시 번성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당한 상업 활동을 통해 얻은 재산이라면 아무리 많은 재부를 모았다 할지라도 결코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영광스러운 것이라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결과는 바로 하늘이 주신 복으로서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간주한 것이다. 이와 같이 상업 활동을 통해 이윤을 취득하는 것과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관료로 나아가는 것을 동시에 논하는 방식의 가정교육은 부상대호가 세세손손 상업 활동에 종사할 수 있었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왕원셴은 평생에 걸쳐 전국을 쉬지 않고 돌아다녔기 때문에 이로 인해 피로가 누적되어 병을 얻어 명조 가정2년(1523년)에 장루(長蘆) 정가(鄭家)의 염장(鹽場)에서 54세의 나이로 객사하였다. 임종 전에 그는 상인의 입장에서 스스로 평생에 걸쳐 일구어 온 상행위와 상업정신에 대해 개괄적으로 언급하였는데, 한 마디로 말해 상인과 선비는 윤리도덕과 가치관념에서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훌륭한 상인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과 선비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모두 공통적으로 사회윤리 도덕의 제약을 받게 되므로, 따라서 상인과 선비는 사회가치의 저울에 놓고 보자면 높고 낮음, 고상하고 비속함, 귀하고 천함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왕원셴은 “상업으로 집안을 일으켜 마침내 가문을 크게 세워 제사를 모시고 혼례를 치루었으며 네 동생을 모두 자립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왕원셴, 왕야오의 막내 동생 왕커(王珂)는 형들의 든든한 재정적 뒷받침 덕에 진사에 합격하여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올랐으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왕야오은 슬하에 3남 5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인 왕충이는 염상이 되었고, 둘째 아들인 왕충쭈(王崇祖)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으며, 셋째 아들이 바로 왕충구(王崇古)였던 것이다. 왕충구(1515-1588년)는 자가 학보(學甫)로서 가정20년(1541년)에 진사에 급제하여 형부주사(刑部主事), 섬서안찰사, 하남포정사, 우부도어사, 병부우시랑, 총독선대산서군무를 역임하였다. 隆慶4년(1570년) 알탄의 손자 바한네제이(把漢那吉)가 청조에 투항하자 왕충구는 이를 계기로 알탄과 시장을 개설하기 위한 협상에 온 힘을 쏟았다. 이로부터 마침내 변경에 평화가 찾아왔으며, 수 천리에 걸쳐 군민들이 평화로이 농사에 전념할 수 있게 되어 다시는 매년 군사를 일으킬 필요가 없게 되었다.


왕충구의 누이 가운데 첫째가 僑居 푸저우의 선(沈)씨와 결혼하였는데, 선씨는 염상 집안이었다. 『務麓堂集』28권에는 왕충구의 장인인 천팅전(沈廷珍)에 대해 "가업인 상업 활동을 위해....남쪽으로 배를 타고 양웨(揚越)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는 관롱(關?)에 이르렀다"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장사에 재능을 발휘해 많은 재산을 모았다. 천팅전의 장자 천쟝(沈江)은 바로 왕충구의 처남으로서, 역시 상인이었다. 왕충구의 둘째 누이는 장윈링(張允齡)과 결혼하였는데, 그가 바로 장쓰웨이의 모친이었다. 왕충구의 셋째 누이는 옌이어(閻一?)와 결혼하였고, 넷째 누이는 감생 닝샤(寧夏)와 결혼하였으며, 다섯째 누이는 상생(庠生)16) 류이즈(劉一直)와 결혼하였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왕충구 일가도 역시 상인과 관료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던 가문이라는 사실이다.17)




1) 북쪽 변경 방위의 최고책임자


2) 현재의 산서성 永濟


3) 현재의 蘭州


4) 현재의 감숙성 ?伯縣 동쪽


5) 산동성 四原에서 발원하는 회하의 지류


6) 강소성 남부와 절강성 북부지역 일대


7) 호남성과 호북성


8) 사천성


9) 절강성 동부지역


10) 중국 호남성과 강서성 남부와 광서성, 광동성 북부의 경계에 있는 越城, 都龐, 萌渚, 騎田, 大庾 등 다섯 령


11) 현재 산동성 서남쪽 10개 縣의 지역


12) 하남성


13) 현재 섬서성의 富縣


14) 명대, 청대 양대에 걸쳐 과거의 답안용으로 채택된 특별한 형식의 문체


15) 사천성


16) 지방학교의 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