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중국의 상인 (7)    晉商 介休侯家

옌훙중(燕紅忠)ㆍ류청후(劉成虎) _ 중국 산시대학 진상학연구소 씀

김지환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옮김



쉬커(徐珂)는 자신의 저작인 『?稗類?』에서 진상의 거상을 들면서, 졔슈(介休) 허우가(侯家)의 재산이 700-800만 량에 달해 성 전체에서는 두 번째를 차지하고, 晉中 부호 가운데에서는 첫 손가락을 꼽는다고 설명하였다. 졔슈 허우가는 비단업으로 성장한 가문으로서,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인 허우싱위(候興域)은 ‘비단대왕’이라고 불리웠으며, 현지 사람들도 그를 ‘허우바이완(侯百萬)’이라고 불렀다. 그의 부친인 허우완잔(侯萬瞻)은 멀리 수저우, 항저우 일대에까지 비단을 판매하였는데, 산 넘고 물 건너 힘든 여정이기는 하였지만 이러한 가운데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아들인 허우싱위가 사업을 물려받은 이후 거래 규모가 더욱 확대되었다. 수십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진중 지역에 소유한 전답이 끝을 알 수 없었고, 노새와 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으며, 어마어마한 저택도 보유하게 되었다. 平遙、介休、晉南、河北 등에서는 허우가의 비단점, 찻집, 전당포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허우싱위는 슬하에 泰來、恩來、慶來、迪來、章來、榮來 등 여섯 아들을 두었다. 가경13년(1808년)에 환갑을 넘긴 허우싱위는 평소 병치레가 잦아 스스로 살날이 머지 않았다고 여겨, 자식들에게 재산을 고루 상속하는 중국의 전통적 관행에 따라 일부 재산을 자신의 노후를 위해 남겨두고, 나머지를 6등분하여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자제들로 하여금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가능한 한 서둘러 경영할 수 있는 담력을 키우도록 독려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가장으로서 여전히 상업의 전반적인 경영에 적극 관여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허우싱위가 세상을 떠나자 장남과 차남도 연이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이러한 까닭에 허우가 가문은 셋째 아들인 허우칭라이(侯慶來)가 여섯 주주의 상업을 맡아 책임지고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


허우칭라이의 자(字)는 두자이(篤齋)이며, 훗날 이름을 허우페이위(侯培餘)로 개명하였다. 그는 여섯 아들 가운데 가장 총명하고 세상물정에도 밝았다. 그는 강희 말년에 태어나 가경20년(1818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부방(副榜)1)이 되었다. 그는 맡겨진 업무를 민첩하고 능숙하게 처리하여 스스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관리로서의 길을 버리고 가업을 이어 받은 이후에는 재능 있는 사람을 널리 구하고 구래의 적폐를 과감히 개혁하였다. 무엇보다 먼저 그는 핑야오(平遙)에 개설한 ‘協泰蔚’、‘厚長來’、‘新泰永’ 등의 비단점 자호(字號)를 ‘蔚泰厚’、‘蔚?厚’、‘蔚盛長’ 등의 ‘蔚’ 字號로 변경하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렇게 고친 이유가 자신의 부친의 자가 위관(蔚觀)이었기 때문에 위(蔚)자를 따서 상점의 명칭으로 함으로써 부친이 창업한 어려운 시절을 영원히 잊지 말자는 뜻을 자손들에 전하여 경계하도록 하려는 뜻이라고 한다. 그는 유명한 서예가인 쉬룬디(徐潤第)에게 대련을 써 주도록 부탁하여 집안의 대청에 걸어 두고 자손들로 하여금 집안을 경영해 나가는 좌우명으로 삼도록 하였다. 대련의 한 편에는 “학문에 큰 성취가 있으며, 장사도 번창해 나아감에 그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를 깨닫는다면 자연히 더욱 번창할 것이다”라고 써 있으며, 다른 한 편에는 “창업은 어려우며, 이를 지켜 나가는 일은 더욱 어렵지만,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깨닫는다면 그 어려움을 어렵지 않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써 있었다.


허우페이위는 셋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셋째 집안’이라 불렀으며, 저택의 명칭도 ‘구여당(九如堂)’이라 하였다. 허우페이위는 재능이 많았지만 도광7년(1827년)에 36세의 이른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사후에는 둘째 아들인 허우인창(侯蔭昌)이 허우가 집안의 상업을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

 

1 _(蔚)자 표호가 전국에 널리 퍼지다.


허우인창은 자가 구탕(古棠)으로서, 가경 연간에 출생하였다. 업무를 처리함에 대범하고 강직하였으며, 한 번 사람을 쓰면 철저히 믿어 주고 의심하지 않는 미래지향적인 관리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점포와 리성창(日升昌)은 불과 몇 집을 사이에 두고 같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도광3년에 平遙 西達蒲 이가(李家)의 ‘서유성(西裕成)’ 안료장(顔料莊)이 리성창 표호로 영업을 변경한 이후 장사가 번창하고 이윤이 급증하자 허우인창은 이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蔚泰厚 綢緞莊을 표호로 바꾸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마침내 도광14년(1834년) 허우가의 위타이허우 주단장은 蔚泰厚票號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는데, 핑야오성 안에서 리성창에 이어 두 번째로 개업한 표호가 되었다.


허우인창은 위타이허우 표호의 소유자로서, 마오흉훼이(毛鴻?)를 총지배인으로 임명하였다. 위타이허우 표호는 설립 이후 장사가 날로 번창하였다. 같은 해, 허우인창은 마오흉훼이의 건의를 받아 들여 위펑허우(蔚?厚) 주단장과 신타이허우(新泰厚) 주단장을 표호로 개조하였으며, 계속해서 다른 사람과 합자로 개설한 톈청헝(天成亨), 위창허우(蔚長厚) 포목점 역시 표호로 개조하였다. 이들 두 표호점 역시 마오흉훼이가 경영을 맡았다. 이렇게 되자 6가 표호는 산서 표호업 가운데 허우가 위(蔚字號)라고 불리웠다.


위자 표호의 총자본액은 백은 60만 량에 달하여 리성창의 규모를 넘어섰다. 마오흉훼이가 표호를 창업한 공적을 표창하기 위해 허우인창은 위타이허우와 신타이허우의 일부 주(株)를 마오흉훼이의 지분으로 넘겨주었다. 마오흉훼이는 총지배인이 됨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할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더욱이 허우가가 자신에게 베풀어 준 환대에 감격하여 더욱 전심전력을 기울여 표호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이러한 결과 불과 1년 만에 괄목상대할 정도로 위자호의 사업은 더욱 번창하였다. 마오흉훼이는 높은 직급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리성창으로부터 업무에 밝은 두 친구를 끌어 와서는 이들에게 중책을 맡겼다. 이와 같은 마오흉훼이의 적극적인 노력에 힘입어 위자호의 사업은 더욱 번창하였으며, 그 결과 높은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자 허우인창은 마오흉훼이의 관리 능력을 한층 격려하기 위해 그에게 위타이허우 등의 표호에 일정한 액수의 자본금을 투자하여 주주로서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와 같이 晉商에서 실시한 고빈제(股?制)2)는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위자호는 마오흉훼이의 헌신적인 경영 노력에 힘입어 6가 표호가 마치 한 줄의 밧줄처럼 힘을 모아 곳곳에서 고객을 유치하고 분점을 개설하였으며, 이러한 결과 몇 년이 되지 않아 리성창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 위자호는 도광, 함풍, 동치의 30여 년에 걸친 발전을 통해 세력이 날로 번성하여 오히려 늦게 출발한 자가 위에 서는 형세로 발전하였다. 지콩뤠이(冀孔瑞)가 저술한 『졔슈 허우바이완과 위자호(介休侯百萬和蔚字號)』에서는 허우인창이 위자호를 관리한 시기에 각 표호의 자본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蔚?厚:10萬兩 

蔚盛長:12萬兩(후에 16萬兩으로 증가하였다. 이 액수에는 平遙 王培蘭의 자금이 포함되어 있다.)

天成亨:16萬兩(후에 20萬兩으로 증가하였다.)

新泰厚:16萬兩

蔚長厚:15萬兩

당시 위자호는 上海、蘇州、杭州、寧波、廈門、福州、南昌、長沙、常德、漢口、沙市、濟南、北京、天津、沈陽、哈爾濱、成都、重慶、蘭州、肅州、西安、三原、迪化、廣州、桂林、梧州、?州、開封、周家口、道口、昆明、太原、運城、曲沃 등 지역에 모두 분점을 두고 있었다.


업무가 발전함에 따라 위자호의 직원들도 부단히 증가하였으며, 그 조직도 날로 확대되었다. 관리를 엄격히 하고, 효율을 제고하며, 또한 업무를 확대하기 위해 지배인과 소유주들은 협상을 통해 平遙 超山書院의 쉬송칸(徐松龕)(繼?)을 초빙하여 비교적 완정한 형태의 표호 규약을 제정하였다. 합자 경영자의 권한, 결산시 영리의 분배 방법, 표호 내부 직원의 편제 및 배치, 승진, 복리 대우 등에 대해 하나하나 명확한 규정을 둠으로써 위자호의 경영에 체계를 잡아 기초를 공고히 하였다.


이 때 위자호의 창업공신인 마오흉훼이는 이미 명성이 자자하여 일선 경영에서 물러난 상태였다. 핑야오 東邢村에 있는 고향에 아름다운 저택을 지어 그곳에서 유유자적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위자호에 자신의 자본을 투자한 주주의 한사람이기도 하였다.  


2 _ 속임수를 써서 명성을 유지하다.


위자호는 특히 신용을 중시하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 허우가 집안은 온갖 지혜를 짜내었는데, 심지어 사람들을 우롱하는 수단마저 마다하지 않았다. 태평천국운동이 발생한 기간 동안 사람들은 마음이 두렵고 불안하였으며, 도처에 유언비어가 횡횡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핑야오성 안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표호로 몰려가 현금을 인출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는데, 허우가 표호의 문전에도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점원들이 갖은 논리로 이들을 설득하려 하였으나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곧바로 표호의 문이 부서져 열리면서 바야흐로 일촉즉발의 재난이 발생할 긴박한 순간이 다가왔다. 그런데 이와 같이 결정적인 순간에 노새를 몰고 오는 상인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노새의 방울소리와 뒤섞여 거리에 울려 퍼졌다. 긴 행렬의 노새떼는 육중한 은괴상자를 싣고 있었으며, 짐을 가득 실은 마차들이 줄을 이어 마부들의 고함소리와 어우러져 핑야오성의 서쪽 대로로 기세 좋게 들어섰다. 그러자 표호에 몰려들어 소란을 피우던 사람들이 마차마다 가득 실린 은괴 상자와 의기양양한 표호 직원들, 그리고 표사(?師)3)들을 목도하고서는 “허우할아버지 집안이 이렇게 넉넉한데, 돈을 인출하려고 몰려든 사람들을 두려워 하겠는가?”라는 말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더욱이 점원들은 은괴상자를 싣고 온 사람들은 ‘선발대’에 불과하며, 허우가의 고향인 介休에서 본진은 아직 출발도 안했다고 전하였다. 이렇게 민심을 안정시키자 몰려온 사람들도 이내 안정을 되찾았으며, 마침내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 때 노새 등에 실린 은괴상자 하나하나는 모두 가짜로서, 그 안은 대부분 돌로 채워져 있었다. 허우가는 속임수로 몰려든 사람들을 피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자호의 신용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초창기 위자호는 주로 어음을 수취인에게 이체하는 과정에서 수수료를 챙기거나, 예금이나 대출 등의 업무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였으며, 경영 대상은 주로 대상인나 소상인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업 방식으로 대규모의 이윤을 창출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던 차에 리성창 표호가 정부 관리들에게 줄을 대어 정부 재정을 취급하게 되면서 막대한 은량이 들고 나는 광경을 목도하고 나서는 바로 왕부(王府)4)에 줄을 대어 권력과 관계를 형성하였다. 1873년 청조에서 병사의 양식이 부족해지자 위자호는 즉시 20만량에 달하는 백은을 정부에 차용해 주었다. 부정한 방법을 통해 총통의 지위에 오른 차오쿤(曹?)이 여우모피옷 400벌이 급하게 필요하다고 하자, 위자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이를 구해다 바쳤다. 이러한 결과 위자호의 주요 고객에는 큰 변화가 발생하였다. 이후 위자호는 관가의 현물세나 세금, 군량미, 인두세, 청조 정부가 가렴주구하여 거두어들인 온갖 세금, 탐관오리들이 수뢰하여 거두어들인 부수입 역시 취급하였다. 한 장의 어음을 취급하면 바로 수십 만 량의 은량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 그 이윤이 얼마나 컸는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노릇이었다. 주주에 대해 배당하는 이윤 역시 한 주당 은 만 량에 달하였다.


광서3년에 큰 가뭄이 발생하자 산서순무 쯩궈촨(曾國?)이 진중의 각 표호에게 의연금으로 은 12만 량을 모으도록 하였는데, 이 가운데 위자호의 소유자인 허우인창혼자서 1만 량을 출연하였다. 쯩궈촨은 그 답례로 그에게 ‘樂善好施’5)라는 편액(扁額)6)을 하사하였다. 사실 위자호의 규모로 볼 때 1만 량은 조족지혈에 불과한 액수라 할 수 있다. 매번 결산을 통해 이윤을 분배할 때마다 수십 만 량에 달하는 막대한 은량이 베이지아촌(北賈村)의 허우가 집안으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갔다.


3 _ 개혁의 실패, 표호의 도산

 

허우가 표호가 이와 같이 일세를 풍미하였으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각 지역 분점의 지배인과 관리인들이 점차 함부로 권세를 휘두르고, 사치스럽고 안일한 분위기에 젖어들고 말았다. 위자호 베이징 분장 지배인은 경친왕(慶親王)과 막역한 관계를 형성하여 전용 가마를 타고 관부를 출입하였는데, 그 자태가 마치 청조의 관리와 다름없었다. 한구 분장의 지배인 왕쭹원(王仲文)은 도박 한 번에 1만 량을 잃곤 하였다. 복주 분장 지배인 장쉬린(張石麟)은 20여 년간 본점에 바친 이윤이 무려 은 60만 량에 달하였기 때문에, 그 나머지 돈으로 아편 흡연, 도박 등에 제멋대로 물쓰듯하였으나 본점으로서는 그에 대해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지배인들은 화려한 의상에 돈을 물쓰듯하여, 여름에는 하루에도 세 번이나 비단옷을 갈아입고, 겨울에는 하루에 세 번이나 가죽옷을 갈아입었다. 한코우 분장 지배인 리줘메이(李作梅)는 여름철에 입는 홑옷을 만들기 위해 특별히 사람을 항저우에 파견하여 그곳에서 비단옷을 주문 제작하였다. 이 비단은 6종류의 서로 다른 제직기를 가지고 작업해야만 비로소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고급 제품이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스라소니 모피, 들창코원숭이 모피, 담비 모피, 수달 모피 등 없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각 분장은 특별히 문방(門房), 주방(廚房), 재봉방(裁縫房)의 3房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당지의 보석점, 모피점, 비단점은 자신들의 제품을 다투어 분장의 지배인에게 보내어 구매하도록 하였다.


위펑허우(蔚?厚) 베이징 분장 지배인 리훵링(李宏齡)은 위자호 지배인들의 이 같은 썩어빠진 작풍을 목도하고서는 당시 소유주인 허우총지에(侯從傑)에게 “요즘 각 호의 작태를 보자면 그 행태가 정말 가관이다. 지배인들이 부패하고 타락함이 극심하여...만일 이를 시급히 바로잡지 않는다면 이후에 이를 바로잡고자 해도 이미 때가 늦을 것이다”라고 편지를 써 보냈다. 그러나 당시 허우총지에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수수방관하였으며, 결국 예전의 위자호 규약들은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되었다.


마침 이 때는 표호가 시련을 맞게 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근대적인 은행의 도전을 꼽을 수 있다. 광서23년(1897년) 중국통상은행이 설립된 이후 1911년까지 중국 내에선 관판이나 상판은행이 총 17개나 들어섰다. 이들 근대적 은행들은 모두 어음을 주요한 업무의 하나로 취급하고 있었다. 이는 종래 마찬가지로 어음을 주요한 업무로 취급해 왔던 표호에게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광서31년(1905년)과 광서33년(1907년)에 호부은행(戶部銀行)과 교통은행(交通銀行)이 각각 설립되었다. 이들은 청 정부의 특권을 이용하여 표호의 업무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호부은행 본점은 北京,上海、天津、漢口、庫倫、恰克圖、張家口、煙台、?島、營口、奉天 등의 지역에 모두 분점을 개설하였다. 1906년 청 정부는 모든 호부은행 분점이 설립된 지방에서 “호부은행의 어음, 저축 등의 자금은 모두 수시로 해당 은행과 상의하도록” 비준하였다. 통상은행, 호부은행, 교통은행은 하나같이 권력에 줄을 대어 환어음 업무에서 유리한 형세를 조성하고, 이를 통해 기존 표호의 세력을 효과적으로 잠식해 나갔다.


그 다음으로, 중국에 있던 외국은행들도 표호가 가지고 있던 어음업무를 두고 쟁탈전을 전개하였다. 20세기 초부터 중국에 있던 외국은행의 세력이 날로 확장되면서 표호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예를 들면 상하이 면사에 대한 톈진의 환어음액이 매년 약 1000만 량에 달하였는데, 이 가운데 외국은행이 약 절반가량을 취급하였으며, 중국 전장 은호가 30%, 표호는 20%에 불과하였다.


광서34년(1908년) 리훵링은 금융계에 큰 변화가 발생하였음을 잘 인식하고 표호를 은행으로 개조하는 길만이 살 길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일본에서 유학한 祁縣票商 취추난(渠楚南)과 함께 경도의 祁、太、平 三? 票莊과 연합하여 산서 위자호 본점에 서신을 보내 은행으로 개조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와 동시에 각지 표장에도 편지를 보내 의견을 보내주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각지 표장들이 줄을 이어 의견을 보내왔는데, 경도 표장의 건의에 호응하여 은행으로 개조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리훵링이 발동한 표호 개혁의 계획은 위자호 본점의 수구세력의 반대에 직면하였는데, 이 가운데 앞장서 반대한 자가 바로 마오훵한(毛鴻翰)이었다. 마오훵한은 광서24년(1898년) 위태후 총지배인이 된 이후 줄곧 핑야오현성에서만 거주해 왔으며, 따라서 바깥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해서는 까막눈이었다. 더욱이 이미 60여 세에 이르러 기력이 쇠하고 생각도 과거지향적으로 변하여 현상 유지에 급급할 뿐이었다. 이와 같이 리훵링 등이 발의한 표호의 개혁 계획은 마오훵한을 대표로 하는 일군의 수구세력의 반대에 직면하여 좌절되었으며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신해혁명 이후 허우가 표호는 금융의 변화와 시국의 격류에 따라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漢口、成都、西安、重慶、蘭州、昆明 등 지역에 있던 위자호 분장들은 하나같이 약탈당하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방화로 3일 동안이나 불길이 치솟기도 하였다. 톈청헝(天成亨)의 각지 분장들은 백은 약 30여 만 량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으며, 위타이허우(蔚泰厚)의 각 지역 분장들도 2만여 량에 달하는 약탈을 입었다. 위성창(蔚盛長)의 각지 분장들도 현은 7만여 량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으며, 신타이허우(新泰厚)의 각지 분장도 현은 8만 량을 약탈당하였다. 그러자 각지에서 예금자들이 분분히 돈을 인출하기 위해 표호로 몰려들었다. 일부 분장들의 지배인과 직원들은 이 틈을 타 손실을 허위로 보고하였고, 어떤 이들은 자금을 가지고 잠적하였으며, 이에 후가 표호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청조가 멸망한 이후 허우가의 재력은 날로 쇠하였으며, 전국적으로 표호에서 돈을 인출하는 풍조가 계속해서 전개되자 이를 수습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점차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4 _ 재부를 헤프게 써서 명성이 쇠락하다.


각 지역의 위자호가 약탈당하고 방화되었으며, 와해되어 도산했다는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우가의 사람들은 위기를 실감하지 못하고 여전히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사치와 방탕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서서히 침몰해 가고 있었다. 허우가는 허우싱위 이후 허우타이라이 등 여섯 형제가 각각 독립적으로 지분을 가지고 있었으나, 상업에서는 여전히 일체적으로 경영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형제들이 모두 각각의 표호에서 균등하게 주식 지분을 소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위타이허우는 광서5년(1879년)에 재차 작성한 계약서에서 모두 40.2주에 달하는 주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姓六家의 8.1주를 제외하고 허우가는 모두 16.1주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합자가 9.1주, 장자 집안의 소유가 0.7주, 차남 집안이 1주, 삼자 집안이 1.5주, 사자 집안이 0.6주, 오자 집안이 2주, 6자 집안이 1.2주였다. 이와 동시에 각 상호는 반드시 한 사람이 주도적으로 관리하도록 하였다. 허우가 가문은 계속해서 셋째 집안이 경영권을 장악하여 주도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는데, 말하자면 培餘、蔭昌、從傑이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셋째 집안이 허우가 여러 형제들을 대신하여 상호를 관리해 주었기 때문에 그 공을 생각하여 특별히 셋째 집안에 별도의 空股를 인정해 주었다. 후에 이들 空股는 ‘侯氏宗祠’의 지출로 간주되었으며, 일부 수입을 추렴하여 지방 공익을 위해 지출하였다.


허우인창의 아들인 허우총지에(1848-1908년)는 상업에 매우 능숙한 사람이었다. 『侯從傑墓志』에 기록에 따르면, “성은 허우씨요, 이름은 총지에이요, 자는 줘펑(卓峰)이다...통의대부(通議大夫)의 작위와 花翎7)을 하사받았으며,?中의 직함과 光祿寺署正 4급貢生에 올랐다...가업을 이은 이후 매사에 성실하게 임하였으며, 사람들을 성심성의껏 대하고 신의를 중시하였다. 이러한 결과 성 안에 자신의 사업과 관련된 분점이 없는 곳이 없었으며, 상호 밀접한 연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更子年8) 이후 국내의 상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허우총지에는 철두철미하게 계획을 세워 이에 대처하였으니 뭇 상인들이 이를 따라 배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설사 잘못이 발생하더라도 허우총지에가 한 마디 하면 모두 해결되었다”라고 하였다.


허우총지에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 처인 왕씨가 위자호의 경영을 대신 맡았으며, 그리하여 사람들은 왕씨를 ‘侯四 마님’이라고 불렀다. 이 때 위자호는 이미 형세가 하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허우가의 호화 사치 풍조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허우총지에의 장례는 6개월 동안 이어졌으며, 3일 동안 문상을 받는데 소요된 비용이 무려 은 1만여 량에 달할 정도였다.


허우인창의 조카 허우퀘이(侯奎)는 졔슈에서 돈을 물쓰듯하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闊少爺였다. 당시 제슈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즉 “제슈에는 세 가지 통제 불능인 것이 있었는데, 바로 허우퀘이(侯奎), 링거(靈哥), 리다왕(二大王)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첫 번째가 바로 허우퀘이이며 링거는 제슈의 부호인 지궈딩(冀國定)의 장남이며, 리다왕은 바로 궈슈셴(郭壽先)을 가리키며 바로 제슈의 부호인 궈커관(郭可觀)의 동생이다. 이들 세 사람은 핑야오, 제슈 일대에서 재력과 권세에 의지하여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날뛰어 아무도 이들의 비위를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가무, 여색, 애완견 사육, 승마 등에 열중하면서 돈을 물쓰듯하였다. 한번은 허우퀘이가 타이구(太穀)에 있는 한 비단점에서 밥을 한 끼 먹었는데, 식사 후에 지배인이 상점의 비단을 사주도록 요청하자 허우퀘이는 갑자기 흥미가 발동하여 그 자리에서 상점에 있던 비단을 남김없이 사버리고 말았을 정도였다. 링거가 이 사실을 전해 듣고서는 경쟁심이 발동하던 차에 마침 시계점 주인이 그를 식사에 초대하자 식후에 그 점포의 시계를 모두 사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제슈에서는 매년 9월 20일부터 30일까지 열흘 동안 묘회가 거행되었는데, 허우퀘이와 링거는 모두 종복을 이끌고 마차를 타고 여기에 참가하였다. 그들은 묘회에서 마차경주로 내기를 걸었는데 한 쪽은 景泰蘭十三太保車였고, 다른 한쪽은 關東灰鼠裏圍出風車였다. 마차를 끄는 말은 천금을 아끼지 않고 구입한 명마였다. 2寸의 향이 타는 시간을 기준으로 張蘭? 西門을 출발하여 동문으로 가서는 다시 돌아오는 경주였다. 사람들은 이를 구경하기 위해 발 딛을 틈도 없었는데, 말들이 비호처럼 뛰어 가는 바람에 말에 밟혀 사람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직 마차 경주에만 열중하였다. 더욱이 이들은 수연통(水煙筒)9)에 불을 붙이기 위해 돈을 태워 여기에 불을 당겼는데, 지폐 한 장을 불사를 때마다 밀가루 50근이 사라지는 셈이었다. 이와 같이 재부를 겨루는 방법은 가장 돈을 헤프게 사용할 수 있는 극단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해혁명이 발생한 이후 허우가가 각 지역에서 가지고 있던 상호는 끊임없이 약탈과 방화에 시달렸으며, 그 결과 도산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허우가의 마님과 자제들은 여전히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젖어 있었다. 이들은 아편을 흡연하였으며, 식사 때마다 반드시 산해진미가 등장하였다. 재원이 끊겼는데도 앉아서 소비만 하고, 방탕하게 생활하여 결국 가지고 있던 재산을 탕진할 수밖에 없었다. 항전 전야에 이르러 졔슈 허우가의 마지막 자손인 허우츙기(侯崇基)가 일시적으로 사업을 번창시키기도 했지만, 이미 예전의 세력을 회복하기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머지않아 일본군이 산서에 침입해 들어오자 허우츙기는 아편중독으로 인한 발작으로 결국 동사하고 말았다.


허우가 가족의 재산이 어마어마했을 당시 일찍이 고향집인 제슈 북가촌에서 토목사업을 대대적으로 진행하여 3개의 마을 요새를 건설한 바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제슈시의 舊堡、舊新堡、新堡 등으로서 당시에는 대단히 웅장하고 호화로웠다. 오늘날 제슈시 장란진의 舊新堡村과 허우가 저택도 이미 허물어져 예전의 모습을 잃어 버렸다. 그러나 모든 촌장이 하나같이 동일한 규격으로 건축된 모습으로부터 당시 허우가가 얼마나 대단한 세도를 누렸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 명청대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거인(擧人)의 인원수에 제한이 있어 거인의 자격을 받지 못한 사람 중에서 국자감(國子監)에 입학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2) 여기서 말하는 股?制는 일종의 주주제(株主制)로서, 주식 구입 또는 주식 투자의 방식으로 연합한 기업 재산의 조직 형식이며, 주식 수입이 얼마인가에 따라 수익 분배를 진행한다.


3) 옛날, 여객 또는 화물의 안전을 위해 경영되었던 운송업의 하나를 가리킨다.


4) 황족이나 왕족이 기거하던 저택.


5) 선을 즐기고 베풀기를 좋아한다는 뜻, 즉 선행(善行)이나 자선사업(慈善事業) 등을 표양하는 의미이다.


6) 종이, 비단, 널빤지 등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문미(門楣) 또는 벽 위에 걸어 놓는 현판


7) 청대 황족이나 고관에게 하사한 모자로 모자 위에 공작꼬리가 드리워져 있다.


8) 1900년 의화단운동을 가리키며, 庚子事變이라고도 부른다.


9) 중국에서 주로 쓰는 담뱃대의 한 종류로 담배 연기가 물을 거쳐 나오게 되어 있음.